지난밤은 춘천에 있는 <세그루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냈어요. 다른 여행객이 없어서 마치 독채를 혼자 쓰듯이 했지요. 아침의 시원한 공기와 환한 햇살, 마을을 두리번거리는 토끼, 멀뚱이 쳐다보는 멍멍이, 그리고 따뜻한 차가 아주 좋은 곳이었어요. 다음에 다시 오게 되면 저녁으로 닭갈비를 사먹지 말고, 컵라면을 사가지고 와서 조용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고 싶어지더라구요. 아니면 컵라면을 들고 의암호로 가도 좋을 것 같구요. ^^
춘천에서 차를 타고 좀 더 북쪽에 있는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으로 갔지요. 강원도라서 그런지 공기는 꽤나 써늘하게 느껴졌지만, 미술관을 비추는 햇살이 아주 밝고 환해서 좋은 날이었습니다. 하늘은 어쩜 그렇게 푸르고 맑은지 몰라요.
전시회를 보기 전에 미술관 안에서 잠깐 한숨 돌렸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몸을 데워줬습니다. 저는 박수근 미술관 안에서 햇살을 쬐고, 저 멀리서 박수근의 동상이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박수근 <비둘기>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비둘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으면 비둘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비둘기가 있거나 없거나 관계 없이, 이 작품의 질감(?)만으로도 마음이 쿵! 하더라구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형태만도 아니고 색만도 아닌 그 무언가가 제 마음을 때리는 것 같아요.
굳이 떠올리면 오래된 나무의 껍집을 눈 앞에 가까이 두고 있는 듯 하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나무의 줄기나 가지나 꽃이나 뿌리가 아니라 둥근 몸통의 투박한 껍질 같은 느낌이에요. 껍질만 봐서는 이게 무슨 나무인지조차 모를 껍질이에요.
그저 알 수 있는 거는 오래 살았다는 거, 그 세월을 견디고 버텨왔다는 거, 그래서 거칠다는 거, 또 그래서 거칠지만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거.
그리하여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거.
이번 전시회를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마음에 떠오르는 말은 '단순함'입니다.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자기 욕심만 내세워서 단순할 수도 있을 거에요. 그리고 깊이 느끼고, 핵심에 다가가고, 욕심에서 조금은 멀어져서 단순할 수도 있을 거구요.
박수근 <소>
박수근의 작품들 속, 광주리를 이고 아이를 걸리며 걷는 사람이나 길에서 무언가를 팔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이나 그 모습은 정말 단순해요. 심지어 소도 단순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단순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복잡 미묘한 감정이 떠올라요.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것에도,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는 것에도,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며 움켜안은 팔짱에도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청춘의 멋진 꿈이나 화려한 추억이 아니라 그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일제시대를 지나고 6.25를 지났으니 그들에게 사연이 없다고 하면 되레 이상하겠지요. 겉모습이야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복잡한 마음은 누가 다 알 수 있을까 싶어요. 사흘 밤낮을 풀어 놓아도 다풀지 못할 수많은 사연이 있겠지요. 눈물을 쏟을라치면 크게 한 바가지를 쏟을테고, 울화통 터지는 마음을 화로 풀자면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욕지거리가 난데없이 튀어나오겠지요.
전시관을 나와서 박수근 묘소로 갔어요. 그 앞에 서서 보니 나무와 길이 보이더라구요.
박수근이 그렸던 나무가 저런 나무였을까 싶어요. 잎도 꽃도 없지만 오래도록 저리 버티고 서 있는.
그 사람들이 걸어갔을 길이 저런 길이었을까 싶구요. 한 사람이 광주리를 이고 걷고, 또 또 한 사람이 광주리를 인 엄마를 따라서 걸었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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