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아프고 슬픈 마음을 말로 꺼낼 수 있게 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지요. 아픈 사람이 아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미어터지고 답답 했을까요
죽이고 때린 자들과 한 땅을 밟고 사느라 얼마나 떨리고 긴장 되었을까요. 살인은 범죄이고 처벌 받는다고 하지만, 어찌 그 많은 이들을 죽인 자들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걸까요.
만약 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오늘의 이 음악을 들으시고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혼들을 생각하며 여기 모여 있는 것을 볼 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구자범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러 해 전에 그가 광주시향 지휘자로 있으면서 5.18 기념 음악회를 진행하던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입니다. 정말 마음에 크게 남더라구요. 아...클래식 음악을 하고, 지휘를 하는 사람 가운데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말은 좀 적당하지는 않지만...일단 그냥 말하자면...세상 어느 한 곳에 모여, 사회와 인간의 삶과는 조금 외딴 곳에서 소위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삶을 함께 느끼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연극이나 미술에 비해 클래식 음악은 좀 외떨어진 느낌이 들거든요.
아무튼 구자범이 5.18 기념 음악회를 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 4.3 추념 음악회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했어요. 5.18음악회 때는 광주시향이 있고, 거기에 시민들이 합창단으로 참여 했지요.
4.3 추념 음악회는 이번 공연을 위해서 음악하는 사람들이 새로 모여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더라구요. 00시향이나 00오케스트라와 같은 전문 연주 단체가 음악회를 연 건이 아니라, 아예 4.3 추념 음악회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은 다는 홍보를 하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연주를 한 거지요.
그분들께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런 취지의 행사에 모여서 연습을 하고, 연주를 해 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3.
베르디의 <레퀴엠> 연주를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에요. 지난 해 인가, 다른 단체에서 연주하는 걸 들었었는데...그 때는 좀...밋밋하더라구요.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저는 그냥 제가 좀 이상한가 싶기도 했구요. ‘진노의 날’ 부분이 나오는데도 그냥 멀뚱멀뚱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베르디 <레퀴엠>은 달랐어요. 정말 몸이 찌릿찌릿하더라구요.
봄날 제주를 스치는 바람 같기도 하고,
제가 어찌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할 고통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 같기도 하고,
분노와 울부짖음 속에서 총소리가 나고 피가 터져 나오는 것도 같고...
연주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어요. 저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후달거려서 일어나질 못했어요.
4.
제 마음에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음악과 함께, 지휘자 구자범이었어요.
다른 연주회 같으면 제일 싼 자리를 찾느라 늘 2층 아니면 3층 어디 구석자리에 앉곤 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연주회가 무료라...구자범이라는 사람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1층 앞쪽 자리를 신청했더니, 마침 맨 앞 줄의 오른편 좌석을 주시는 거에요. 덕분에 지휘자의 몸짓과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어요.
‘아...이런 음악이 있을 수도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 게 해 준 구자범님께 감사드려요. 이런 음악과 함께 4.3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너무 안타깝고 아까워요. 저런 훌륭한 분이 좋지 않을 일로 경기필을 그만 두고 가끔 여기 저기 객원으로 지휘를 한다는 게 안타깝고 아까워요. 서울 경기 인천 어디쯤에 있는 오케스트라에서 일을 하게 되면 제가 자주 찾아가서 그의 음악을 들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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