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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 <캐롤>을 다시 보고

순돌이 아빠^.^ 2020. 8. 8. 10:18

오랜만에 <캐롤>을 다시 봤어요. 왜 그런 영화 있잖아요. 살다보면 어느 순간, 어느 사람, 어느 장소에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어떤 영화의 한 장면. 그래서 기회가 되면 다시 봐야지 싶은 그런 영화.

제겐 <캐롤>이 그래요. 인간과 인간의 교감, 교류, 사랑...뭐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영화에요. 예전에는 그런 순간이 되면 <비포 선 라이즈>가 떠오를 때가 있었어요. <캐롤>을 보고 나서부터는 늘 캐롤이 떠오르구요. 

영화의 첫 장면에 무슨 쇠로 된 철문 같은 게 보여요. 도심 한복판의 하수구 뚜껑 같은 거더라구요. 왜 이게 첫 장면일까 싶었어요. 도시 한복판의 하수구 뚜껑...그냥 늘 그곳에 있고, 많은 사람이 오가지만 누구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것이었을까요?

캐롤이 백화점에 아이 선물을 사러 갔다가 거기서 일하는 테레즈를 처음 만나요.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을 사려다가 인형이 다 팔려서 움직이는 기차를 사요. 밸브 같은 것을 돌리면 계속해서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며 달리는 기차. 멈출 줄도 모르고 다른 곳으로 갈 줄도 몰라요. 그냥 같은 길을 빙글빙글 달려요. 

캐롤은 백화점에서 인형과 장난감을 파는 노동자에요. 직원 번호 땡땡땡으로 불리는 노동자지요. 기~인 줄을 서서 한 사람씩 백화점으로 들어가요. 관리자는 딱딱한 얼굴을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요. 백화점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캐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부품 같아요.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캐롤은 혼자라고 느끼지요. 혼자서 그냥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요. 기차처럼. 

테레즈는 쉽게 말하자면 부잣집 사모님이에요.  딸 하나가 있는데 너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남편과는 이혼이 진행 중이에요. 그동안 남편은 늘 자기 일에 바쁘고, 무언가를 성취하느라 쫓아다녔지요. 게다가 남편은 자기 부모와의 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자기 마음 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일과 성공, 부모와 가족 속에 테레즈를 끼워맞춰 놓고 있었던 거지요. 그 속에서 테레즈는 혼자 외로워요. 그리고 그 상태로 10년을 살아왔던 거지요. 혼자서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기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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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는 점심에 뭘 먹을지도 혼자 결정하지 못하면서 살아왔어요. 남들한테 '싫어!'라고도 잘하지 못하고 그저 '응...알았어...' '저기...그런데...' 했던 거지요. 그렇다고 테레즈에게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동안 그런 감정이나 생각을 제대로 느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거지요. 애인 비슷한 남자였던 리처드가 왜 그 여자하고 여행을 가느냐, 학생 시절의 뭐 그저 그런 거냐고 따져요. 그러자 테레즈가 말해요.

 

나는 제대로 말 통하는 사람이 좋다니까!  
I'm fond of anyone I can really talk to.

이렇게 말로 하니까 그 느낌이 잘 안 살아나는데...아무튼 리처드는 결혼이나 가족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정작 테레즈가 사진을 좋아하고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 말이에요. 캐롤의 남편인 하지하고 비슷하지요. 리처드도 하지도 테레즈와 캐롤을 사랑한대요. 그런데 문제는 그녀들이 무얼 느끼고 생각하지는 잘 모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녀들이 외로운 거지요. 

외롭다보니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그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고, 그 누군가가 정말로 말이 통했으면 싶은 거지요. 그랬던 테레즈에게 캐롤이 나타난 거에요. 혼자서는 점심에 뭘 먹을지도 결정하지 못했던 테레즈가 캐롤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하니까 흔쾌히 '좋아요'라고 했던 거구요. 그 한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는 거지요.  그동안 우물쭈물 주저주저 했던 내 안의 무언가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리처드가 나쁜 사람이어서거 아니라 서로가 결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겠지요. 결이 다른 사람이 만나면 느낌도 달라져요. 결을 닮은 사람을 만나면 느낌도 새로워져요.

영화 초반에 테레즈와 캐롤이 식당에 마주앉아 있는 모습이 있어요. 여기에 우연히 어떤 친구 한 사람이 나타나요. 그러곤 서로 헤어지는데...캐롤이 테레즈 어깨에 손을 얹고 지나가요. 그 친구도 테레즈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지나가요. 사람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지나가는 그 단순하고 짧은 순간, 누군가에게는 정말 별 일 아닐 수 있는 그 순간의 느낌이 크게 차이 나요. 가슴으로 파고드는 손길과 무덤히 별 일 없이 지나는 손길이랄까...

리처드도 테레즈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예쁘다고 그래요. 그런데...영화 마지막에 캐롤이 테레즈에게 '사랑해요'라고 하는 장면은 정말...테레즈의 가슴 뛰는 모습이란...아...정말...모든 게 그저 그렇고, 모두가 그저 그런 줄 알았지만...모든 게 그렇지는 않고, 모두가 그렇진 않은 순간이에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어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떨림의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영화속에서 사랑한다고 말해요. 그리고 <캐롤> 속 '사랑해요' 그 한 마디가 제 마음에도 두고 두고 남을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영화속에서 서로의 몸을 만지고 쓰다듬고 섹스를 해요. 그리고 테레즈와 캐롤의 섹스 장면은...음...뭐랄까...첫 섹스 장면은 너무 너무 멋져요. 섹스신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른 섹스 장면은...그 간절함, 애틋함, 소중함, 안쓰러움...등등 온갖 감정이 묻어나요. 얼른 서로에게 달려들어 냅따 홀라당 벗기고 땀 뻘뻘 흘리며 헉헉대다 벌러덩 누워 잠드는 모습과는 많이 달라요. 아...풍성하고 깊은 감정이 담겨 있는 섹스랄까...

이 영화 제목처럼 제 마음에 가장 크게 새겨지는 인물은 캐롤이에요. 얼마나 답답하고 외롭고 암담했으면 그렇게 줄기차게 담배를 피울까 싶어요. 저는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먹지도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그거라도 없었으면 캐롤이 더 망가졌을 것 같은 마음마저 들어요.

테레즈가 캐롤의 집에 놀러가고, 남편이 한바탕 난리를 치죠. 집으로 돌아온 테레즈가 캐롤에게 전화를 해요. 

테레즈 : 이것저것 알고도 싶고 묻고도 싶은데...그게 그러니까...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I wanna know. I think. I mean, I wanna ask you things. But I'm not sure that you want that.
캐롤 : 물어봐요. 뭐라도..제발...
Ask me. Things. Please.

이 장면은 다시 떠올려도 눈물 나요. 캐롤의 모습을 보면 정말...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서 방황하고 힘겨운 시간을 버텨왔는지가 느껴져서요. 얼마나 누군가와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싶고, 얼마나 누군가와 가까이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 했을지 싶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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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주변의 남자들은 참 더럽고 치사해요. 남편 하지도 그렇고, 하지가 고용한 탐정 같은 놈도 그래요. 그리고 그런 놈들에 비하면 캐롤이 얼마나 강인하고 성숙한 인간인가 싶어요. 

이혼을 앞두고 딸에 대한 양육권이 문제가 돼요. 캐롤은 절대 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부도덕함immOrality이 어떠니 행실conduct이 어떠니 X소리를 해요. 법적으로 테레즈와의 사적인 관계까지 공개하고 나서니 캐롤에게도 불리할 수 밖에 없지요. 

제가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꼭지가 확 돌아서 '이런 씨X놈이 오늘 니 죽고 내 죽자.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하고 난리가 났을 건데...캐롤은 그렇게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화나고 답답한 순간에도 서로를 위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특히나 딸의 앞날을 생각하며 고통을 견뎌요. 그러곤 이런 말을 해요.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성향을 부정하고 산다면...그게 내 딸에게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What use am I to her, to us, if I'm living against my own grain?

아이...그냥 말로 하니 그런데...정말 영화 속 캐롤의 모습을 보면...ㅠㅠ

그렇게 캐롤은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 이혼도 하고 직장도 구하고 새로 살 집도 얻어요. 하지와의 결혼 생활도 힘들었고, 이혼 과정도 무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삶을 찾아나선 거지요. 그녀의 곁에는 테레즈가 있을 거구요. 

이 영화를 놓고 동성애 영화니 어쩌니 하면서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자기가 싫으면 안보면 되고, 재미 없으면 재미 없다고 하면 될 건데, 굳이 시간내고 힘을 써서 댓글을 달고 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되레 묻고 싶어요.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서로를 아껴주고 무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 안 느껴지냐구요. 그런 모습이 안 느껴져서 욕을 하는 건지, 그런 모습이 느껴지는데도 동성애가 싫어서 욕을 하는 건지 묻고 싶네요. 동성애라서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하고 싶은데 동성애를 그 대상으로 삼은 건 아닌지 싶구요.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영화를 들었어요. 영화를 듣는다구요? ^^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그럴 때 그냥 틀어놓은 거지요. 자막을 볼 수 없어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그냥 그 목소리와 음악과 여러 소리들을 듣는 거에요. 듣고 있으면 조금 전에 봤던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자막을 보느라 덜 집중했던 배우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그 느낌을 좀 더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제 마음이 깊어지고 편해지는 것 같아요. 더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진다고 할까...영화 속 인물들과 제가 교감하는 느낌이 들면서 제 자신의 삶이 조금 더 편안하지는 것도 같구요. 

테레즈가 캐롤에게 그런 말을 하죠. 

나랑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나요? 
do you feel safe with me?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캐롤>과 함께 있으니 제 마음이 안심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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