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과는 약간의 인연(?)이 있어요. 두어해전에 책을 사서 4분의3정도 읽다가 덮어뒀어요. 그때는 글이 약간 몽롱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안 들어오더라구요.
시간이 흐르고, 제 눈도 좀 더 침침해지고 나서 다시 읽었어요. 이번에는 정말 마음이 미어지더라구요. 그래요. 미어진다는 말이 그나마 적당할 것 같아요. 감동을 받았다거나 슬프다는 말보다는 미어진다는 말이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은 한 여성+흑인+노예의 삶과 마음이 중심이에요. 몇 천년 전 이야기도 아니고 불과 1백 몇 십년 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구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미국의 흑인 노예에 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라는 소설을 좋아해서 여러 사람한테 선물을 하기도 했지만...그저 역사책이나 영화 같은데서 어렴풋이 지나는 이야기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지난해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경찰의 학대로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정말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그게 흑인 노예제와 맞닿아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사건이 다르게 느껴지더라구요.
이 책에서 여성+흑인+노예들이 겪는 일들은 정말...뭐라 말하기가 어려워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 생각지는 않아요. 그런 일이 정말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정말 이런 짓을 벌였을까 싶도록 놀라운 일들이에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이에요.
불과 얼마전의 과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이 겪었다니...조선 시대나 로마 시대의 노비나 노예에 관한 글을 읽어보기도 했지만...정말 이런 일을 벌인 인간들은…
예전보다는 좀 덜 할 것도 같지만 여전히 한국에는 미국+백인을 아프리카+흑인보다 더 선호(?)하는 것 같아요. 백인과도 흑인과도 별 관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흑인보다 백인을 더 좋아하고, 흑인 앞에서는 우월감을 느끼고 백인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그러는 거지요.
백인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역사와 정치에 관한 얘기도 온통 백인 중심이니...직접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좋음과 싫음 갖게 된 건 아닐까도 싶구요.
한동안 책꽂이에 모셔두었던 책을 다시 읽기 잘했어요. 좋은 글을 읽으면 마음이 쿵쾅거리기도 할 뿐더러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BBC에서 미국에서 있었던 조지 플로이드 사망 1주기 관련 시위 장면을 보는데도 확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만약 시간이란 것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면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은 현재에 대해 아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현재에 대해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될 거구요
백인의 지배와 폭력에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 아파요.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노예제에 대해 알게 해준 글쓴이에게 감사드립니다.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문학동네, 2018
그녀는 흑바다 집을 떠나 이 집으로 왔다. 그 집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라도 자기 집 같은 기분을 느껴보려고, 그래서 그 집에서 일할 마음을 가져보려고 날마다 가너 부인의 부엌에 샐서피 꽃 한 다발을 갖다놓아야 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싶었고, 추악한 면은 잊고 싶었다. - 45
세서와 마찬가지로 베이비 석스의 인생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체스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 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갔다.
결국 베이비는 자식이 여덟명이었고 아이 아버지가 여섯 명이었다. 그녀가 인생이 더럽다고 한 것은 체스 말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체스 놀이를 멈추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핼리는 그녀가 가장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있었던 자식이었다. 이십 년, 어린 두 딸이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팔려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야 했던 일에 대한 보상이었다. 또한 셋째 아이인 아들을 데리고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넉 달 동안이나 감독 조수에게 몸을 대줬는데, 아들은 이듬해 봄 목잿값으로 팔려가고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남자의 아이를 배고 만 일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 아이는 그녀가 사랑할 수 없었던 자식이었고, 나머지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한 자식들이었다. - 46
세서는 또한 화덕 앞에 선 자신을 힘껏 끌어안아주던 그의 두 팔을 떠올리며 믿고 싶어졌던 유혹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이대로 진도를 나가며 감정을 느껴도 괜찮을까? 진도를 나가며 뭔가에 의지해도? - 71
이건 폴 디의 책임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감정이 빠르게 겉으로 솟아올랐다. 모든 게 본모습을 찾았다. 단조로운 것은 단조롭게 보이고 열은 뜨거웠다. 창문에는 갑자기 전망이 생겼다. 게다가 그가 노래하는 사내가 되었을 줄이야. - 73
위험해. 폴 디는 생각했다. 정말 위험해. 한때 노예였던 여자가 뭔가를 저렇게나 사랑하다니.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식이라면 더욱더. 그가 알기로는 그저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걸, 그저 조금씩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대상의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포대에 처넣는다 해도, 그 다음을 위한 사랑이 조금은 남아 있을 테니까. - 82
폴 디는 그녀를 내보내고 싶었지만, 세서가 집에 들여놓았으니 자기 집도 아닌데 마음대로 몰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귀신을 몰아내는 일과 KKK단이 전염병처럼 퍼진 동네에서 힘없는 흑인 소녀를 내쫓아버리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흑인의 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용龍이 흑인의 피에 죽도록 굶주려 오하이오 전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 115
“그럼 이런 기분도 좀 느껴보지 그래? 잠을 잘 침대와 함께 잠들 누군가가 있어서, 그걸 얻기 위해 날마다 뭘 해야 할지 죽도록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어떤 건지 말이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라고. 그게 힘들거든, 언제 뭐가 덮칠지 모르는 길을 떠도는 흑인 여자의 심정이 어떨지 좀 느껴보든지. 그런 걸 느껴보란 말이야” - 117
그리고 아들에게는 절대 자기가 마음속으로 던지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서? 세 발 달린 개처럼 절뚝거리는 예순도 넘은 노예 할망구에게 자유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그리고 마침내 자유의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베이비 석스는 자기도 몰랐던 사실을 아들 핼리가 알고 있었다는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유로운 공기라고는 단 한 숨도 마셔보지 못한 핼리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 세상에 자유처럼 좋은게 없다는 사실을, 베이비 석스는 그게 두려웠다.
…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손이 보였고, 눈앞이 아찔할 만큼 단순 명쾌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손은 내 거야. 내 손이야” 뒤이어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또다른 무언가를 새로 발견했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었다. 이게 내내 여기 있었단 말인가? 이 쿵쿵 뛰는 것이? 그녀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가너 씨가 고개를 돌려 커다란 갈색 눈으로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니, 제니?”
그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 심장이 뛰어요” 그녀가 말했다. - 235
“해냈어. 모두 빠져나왔어. 핼리도 없이. 그때까지 내 힘으로 혼자 해낸 유일한 일이었어
….
물론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 일을 해낸 사람은 나였어. ‘계속 가
지금이야’라고 말한 사람도, 주위를 살핀 사람도, 머리를 쓴 사람도 나였어
…
이곳에 도착한 후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진 것 같았어. 어쩌면켄터키에서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무슨 뜻인지 알아?”
…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곳에 도달하는 것, 그래, 그게 바로 자유였다. - 268
베이비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 여덟 명이 제각기 다른 남자의 아이라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흑인이나 백인이나 하나같이 당신을 경멸한다고 말이죠. 노예는 쾌락을 느껴서는 안 된다. 노예의 몸은 쾌락을 느끼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식을 많이 낳아 주인이 누구든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도 쾌락을 느껴서는 안 된다. 할머니는 나한테 그런 소리는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말라고 하셨어요. 언제나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몸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죠. - 344
족쇄를 찬 채, 꿀벌이 사랑하는 향기로운 것들 사이를 걸어가며 폴 디는 백인 남자들끼리 하는 말을 듣고 난생처음 자신의 값어치를 알게 된다. 그는 항상 자신의 가치를 알았다. 아니, 안다고 믿었다. 어엿한 일꾼, 농장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하지만 이제야 그는 자신의 값어치를, 다시 말해 몸값을 알게 된다. 그의 몸무게, 그의 힘, 그의 심장, 그의 머리, 그의 성기 그리고 그의 미래를 달러로 매긴 가치를. - 372
폴 디는 백인들이 그녀를 신시내티까지 쫓아갔다는 것을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녀는 그보다 몸값이 훨씬 비쌌던 것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증식하는 자산이었으니까. -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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