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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21. 8. 13. 13:52

한쪽에서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나라가 폭망했다고 하고

다른쪽에서는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쪽이 맞는 말이든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나 수치가 아니라

실제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마시고 생활하는 삶이 나아졌냐 아니냐 하는 것이겠지요

경제는 성장했고 통계 수치는 나아졌는데 노동자들은 비닐하우스나 천막에 살면서

한 겨울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한다면 그 성장과 그 개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통계 수치로 보면 성장세가 하락했지만 

전 시민들의 식생활과 주거, 의료 등의 상황이 개선될 수도 있겠지요

 

부자들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인 생활이 개선되었다면 말입니다

 

통계와 지표보다

사람과 사람의 생활이 더 중요하겠지요

 

부자들의 취향이나 명품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과 생활이 더 중요할 거구요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까치글방, 2009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동적인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 있다. 이러한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 질서를 교란시킨다. - 13

 

부르주아들의 잔혹함은 16세기 말에, 그리고 17세기에는 더욱 힘해졌다. 이들이 가진 문제의식은 빈민들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병자와 불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병원(hospital*)으로 보냈고 성한 사람은 두 사람씩 사슬에 묶어 이 시의 하수도를 청소하는 힘들고 한없이 지루한 일을 시켰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치세 말기에 빈민법poor laws이 나왔는데 사실 이 법은 빈민을 억압하는 법laws against the poor이었다. 차차 서구 전체에 걸쳐 빈민과 “달갑지 않은 자들”을 위한 기관들이 늘어갔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강제노역을 하게 되어 있었다.
* 이 단어는 오늘날과 같이 ‘병원’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에는 그 의미보다는 빈민, 광인, 불구자, 병자 등을 수용하여 격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 - 91

 

1597년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비非전염성”이라는 질병은 무엇이었을까? 이 병은 서혜부나 겨드랑이, 목이 붓고, 일단 열이 나면 5-6일 만에 나아서 서서히 회복되든지 아니면 곧 죽든지 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로서 습기 찬 집에 살거나 심지어 맨땅에 누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규모 공격 앞에서 잘먹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라리아에 대한 최선의 치료는 가득 찬 솥이다”라는 토스카나의 속담은 아주 잘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1921-1923년 러시아에 기근이 심했을 때,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증거에 의하면 러시아 전역에 말라리아가 퍼졌는데, 북극권에 가까운 곳에서조차 마치 열대지방에서와 거의 같은 증상을 띠고 나타났다. 영양 부족은 확실히 질병의 “확산요소”였다. - 98

 

바로 이 1523년 여름에 파리의 페스트는 한 번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을 가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소리는 그의 <이성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죽음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어서, 이 불행한 사건 이전에 몇푼의 돈을 받고 짐을 나르던 일꾼들이 팔에 매우 많았는데 이제는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프티 샹 구역을 보면 수없이 많이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 깨끗이 청소한 것처럼 사라졌다. 

사르트르가 이렇게 쓴 것이 맞는 것 같다. “페스트는 계급관계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붕한 사람들을 면제해준다.” 사부아에서 질병이 지나갔을 때 부자들은 자기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확실히 소독을 하고 나서도 가난한 여자 한 명을 몇주 동안 그곳에서 살아보게 했다. 이 “실험용 여자”는 목숨을 걸고 과연 모든 위험이 사라졌는지 확인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 107 

 

흰 빵은 귀한 사치품에 속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사람들 중에서 밀빵을 먹는 사람은 200만명을 넘지 않았다”라고 뒤프레 드 생-모르는 이야기했다. 만일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흰 빵을 먹는 사람은 유럽 전체 인구의 4퍼센트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시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빵을 만들지 못하는 호밀을 먹고 살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고물에는 밀기울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에서는 흰 빵보다도 더 고급 빵인 “팽 몰레pain mollet”가 인기를 누렸다. 이 빵은 고운 밀가루에다가 (“보통” 효모 대신) 맥주 발효용 효모를 넣어서 만든 부드러운 빵이었다. 여기에 우유를 첨가하면 마리 드 메디치가 그렇게도 탐닉했다는 “왕비의 빵”이 된다...물론 팽 몰레는 사치품이었다. - 183

 

예컨대 설탕은 16세기 이전에는 사치품이었다. 17세기 말 이전에는 후추가 그러했다.

한때 손수건이 사치품이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가 그의 <예절론>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모자와 소매에 코를 푸는 것은 촌놈이나 하는 짓이다...코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손수건에 받고 동시에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몸을 약간 돌리는 것은 우아한 일이다”

사치란 다만 희귀한 것이나 허영인 정도가 아니라 성공, 사회적 매력, 가난한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하려는 꿈이어야 한다-그러나 막상 그렇게 도달하는 순간, 이전의 영예는 곧 사라져버린다. 어떤 의사 겸 역사가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먹고 싶어하던 귀한 음식이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 도달했을 때 갑자기 그 소비량이 폭증한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억눌렀던 식욕이 폭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단 대중화하고(“명예의 상실”과 “확산”이라는 이중의 뜻에서) 나면 이음식은 곧 매력을 잃게 된다...그리고 일종의 포만한 상태에 이른다”

이 게임에서는 경박함, 자만, 변덕이 만개한다. “18세기 영국의 작가들의 문장에서는 거북 수프에 대한 기상천외한 찬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거북 수프는 감미로우며 폐결핵과 무기력증에 대해서 최고의 효과를 내고 식욕을 돋운다. (런던 시장이 주최하는 만찬에서처럼) 호사스러운 만찬에는 반드시 거북 수프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게 되고 유행은 지나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사치는 사실 그 어느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수준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에 의하면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한 정복은 필수적인 것의 정복보다도 더 큰 정신적 자극을 준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지 필요의 존재는 아니다. 경제학자인 자크 뤼에프는 “생산은 욕망의 딸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대중적인 사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충동, 이러한 필요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여러 계층적 차이가 없는 사회는 없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사회적 차이도 사치로 연결된다. 

사치는 산업혁명 이전에 성장이 한계에 부딪친 사회내에서, 생산된 “잉여”를 부당하게, 건전하지 못하게, 그러나 멋지게 비경제적으로 사용하는 것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음식은 요리책에 나오는 음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요리책은 특권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1788년 한 미식가가 프랑스의 훌륭한 요리에 대해서 작성한 목록이 그러한 것

확실히 중국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세련된 음식, 다양한 요리, 심지어 단순히 배부르게 먹는 것조차도 부자들의 이야기였다. 

지난날 세계의 훌륭한 요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치의 편에 서는 것이 된다. - 249-256

 

어쨌든 중요한 소비자는 북유럽과 동유럽에 있었다. 1697년에 네덜란드에서는 “추운 나라에서” 화폐 다음 가는 좋은 상품은 향신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후추와 향신료는 뒤늦게 도착한 곳에서, 그리고 그것이 아직 새로운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더 큰 갈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향신료의 값이 떨어지고 그것이 모든 사람의 식탁에 나타나게 되어서 이것이 더 이상 사치와 부유함의 표시가 아니게 되자, 향신료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동시에 그 권위가 쇠퇴했다. - 308

 

17세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향신료를 버리는 대신 향수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스튜, 과자류, 리쾨르 주, 소스 등에 호박, 붓꽃, 장미수, 오렌지꽃, 꽃박하, 사향 등의 향수를 썼던 것이다...계란에다가도 “향수”를 뿌리는 것을 생각해보라! - 311

 

의복사는 보기보다는 일화적인 수준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원료, 제조과정, 원가, 문화적 고착성, 유행, 사회계층 등의 모든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변화하는 듯한 의복이 사실은 도처에서 끈질기게도 사회적 대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치 금지법은 정부의 조심성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신흥 졸부들이 자신들을 모방하는 것을 보고 사회 상층이 분노를 일으킨 결과이기도 하다. 파리 부르주아지의 부인과 딸들이 비단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앙리 4세도, 귀족들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으로도 출세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또 아무리 사소한 정도라도 사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승했을 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의복을 입고 싶어하는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부 역시 대귀족의 과시적인 사치를 결코 막을 수 없었따. 그래서 베네치아에서는 산모가 어마어마한 치장을 앴고 나폴레에서는 장례식 행렬이 대단했다.

가장 미천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랑시엔 근처의 플랑드르 마을인 루메지에서는, 1696년에 한 신부의 일기에 적힌 바에 의하면, 부유한 농민들이 모두 의상의 사치에만 전념하여 “쩖은이는 금줄, 은줄이 간 모자 같은 것만 찾고, 여자들은 한 척 높이의 머리 손질과 의상에만 몰두 하고 있따…” - 440

 

중국의 경우를 보면 15세기 훨씬 이전부터 관리의 의복이 새 수도(1421)인 북경 부근에서부터 사천이나 운남의 변방지역에 이르기까지 똑같았다...관리들은 집에서는 면으로 된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그들이 공무중일 때였으며, 이것은 사회적인 마스크였고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증이었던 것

회교도에 의해서 정복당했다고 할 수 있는 인도의 경우 적어도 상층 계급은 지배자인 무굴 인들의 옷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441

 

유행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느 곳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이다. 그들의 의복은 아무리 아름답거나 혹은 투박하거나 간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지속될 뿐이다 - 443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도 샬로네와 브레스의 농민들은 참나무 껍질 등을 이용하여 “까맣게 물들인 직물만을 입고 있었으며, 이 방법이 너무나도 일반화되어서 많은 나무가 훼손되었다” - 447

 

나는 유행의 문제에서는 특권층 사람이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그들의 추종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해서 일종의 장애물을 설치하려는 욕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1714년에 파리를 지나가던 한 시칠리아 인이 말한 것처럼, “귀족들이 입는 황금빛 옷과 똑같은 옷을 가장 미천한 사람이 입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큼 경멸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황금빛 옷”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독특한 표시를 만들어야지, 그러지 않고 “모든 것이 변해서 남자든 여자든 부르주아의 새로운 옷이 귀족들의 옷과 같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슬퍼하는 것이다(1779)” 

유행이란 이전의 언어를 낙오시키고 새로운 언어를 탐구하는 것이며, 각 세대가 이전 세대를 부인하고 그들로부터 스스로 구분되려는 방법이다...1714년의 한 문서에 의하면 “재단사는 바느질보다 도안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 - 458

 

유행은 단지 의상만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격언 사전>은 이 말을 이렇게 정의한다 “프랑스 인들이 옷 입는 법, 글 쓰는 법, 처신하는 법을 수천번이나 다르게 변화시켜서 자신들이 더 친절하고 우아하게 보이려고 하나 더 자주는 우스워 보이게 되는 방법”

..

의상만 유행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에도 유행이 있으며, 애교가 넘치는 동작만이 아니라 인기 있는 말 또는 식탁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법, 편지를 조심스럽게 봉인하는 법 역시 유행을 탄다. - 463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현물로 걷던 염세를 1547년 3월일자의 칙령에 의해서 화폐로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금 대상인의 종용을 받아서 행한 것이었다. 

 

현찰 화폐는 여러 방식을 통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근대국가는 화폐의 주요공급자(조세, 용병에 대한 화폐 지불, 수많은 관직에 대한 보상)였으며 이 변화의 수혜자였따. 그러나 유일한 수혜자는 아니었다. 이로부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많았다 : 세금 징수인, 염세 수취인, 담보 대출 업자, 지주, 대상인 기업가, “금융업자”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그물은 어느 곳에나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종류의 알부자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정을 받지는 못했다. 박물관에 걸려 있는 화폐를 다루는 사람들의 그림을 보라. 화가들은 일반인들의 증오와 멸시를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다. - 627 

 

이곳 주민들은 혼자 힘으로 하든 원주민의 힘을 빌리든 간에 식량을 공급해주는 시골을 창출해냈다.

그들은 도시가 필요로 하는 만큼 시골을 만들어내야 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농민들로서, 이들은 자신이 생산한 것을 직접 가져와서 팔았다. - 704

 

만일 도시가 새로운 인력 공급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도시는 그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흔히는 그 사람들이 도시의 빛을 찾아서, 또는 실제로 그렇든 겉보기만 그렇든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더 나은 임금을 찾아서 스스로 모여든다. 그들이 찾아오는 다른 이유는 시골이나 아니면 다른 도시들에서 더 이상 그들을 원하지 않아서 내쳐버렸기 때문이다.

1788년 파리에서는 “잡역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외지인들이었다. 사부아 출신들은 구두 닦는 사람, 마루 닦는 사람, 나무 켜는 사람으로 일했다. 오베르뉴 출신들은...거의 모두 물장수들이었다. - 712

 

도시들은 여러 산업과 길드를 재조직했고, 원거리 무역, 환어음, 상업회사의 첫 형태들, 부기 등을 발명하거나 재발명했다. 그리하여 도시들은 곧 계급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시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갈등과 형제 살해적인 전쟁을 내포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귀족은 부르주아지와 투쟁 했고, 부자는 가난한 자들과 투쟁했다(“메마른 사람들”이 “살진 사람들”과 투쟁했다)

그러나 이렇게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었으면서도 이 사회는 바깥 세계의 적들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결해야 했다. 그것은 외부의 적, 즉 영주, 군주, 농민 등 자기 시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세계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도시는 서유럽의 최초의 “조국”이었으며, 이곳의 애국심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영토국가의 애국심보다 더 일관성 있고 훨씬 더 의식적인 것이었다. - 746

 

사실 유럽 어느 곳에서나 국가가 탄탄히 자리를 잡게 되면 폭력적인 방법을 쓰든 그렇지 않든 본능적으로 도시들을 가차없이 다스리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는 도시의 “지사”가 국왕이 원하는 대로 도시 공동체들(코뮌들)을 복종시켰다. 물론 국왕은 지방의 소귀족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이익을 챙기게 했고 지방 행정에서 헛된 위엄을 누리도록 허용했다.

프랑스에서는 시의 행정 자치와 여러 다양한 조세 등의 특권을 누리는 “좋은 도시들”이 설립되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국왕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국왕 정부는 1647년 12월 21일의 칙령을 통해 허가세를 두 배로 했고 그중 절반을 수중에 넣었다. 파리 역시 국왕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으며 국왕의 재정을 도와야만 했다.

루이 14세도 수도 파리를 버리지 못했다. 사실 베르사유는 파리라는 이 가까운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국왕은 언제나 강력하고 또 두렵기까지 한 이 도시의 주변을 맴도는 습관이 있었다. - 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