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21. 9. 17. 17:57

1930~1950년대 소련의 스탈린 지배 아래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요. 권력 투쟁이 어찌 되었고, 경제 문제가 어찌 되었느냐는 것보다는 주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관한 이야기에요.

 

제목처럼 많은 사람들이 속삭이며 살 수 밖에 없었어요. 말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곧바로 수용소로 끌려가고 총살을 당하고 했으니까요. 심지어는 아무말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고발만으로 '인민의 적'으로 내몰리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얇지 않은 책을 다 읽고나면...음...큰 숨을 쉬게 돼요. 그 시절을 살아내고 살아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읽고 나니...어찌 그 시절을 살아냈을까 싶고...참 뭐라 말을 하기 어렵네요.

지배나 권력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껴요. 가족도 이웃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게 만드니.

 

'속삭이는 사회'라는 말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속삭일 수 밖에, 침묵할 수 밖에 없어던 이유를 알게 될 거에요. 

 

편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거,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싶기도 하구요. 

 

지배하는 힘이 커질수록 침묵하는 사람이 많아지겠죠

자유의 힘이 커질수록 속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아질 거구요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교양인 2013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 두 명과 함께 머나먼 시베리아의 알타이 지역으로 추방당했을 때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아버지는 러시아 북부의 고양 마을에서 집단화가 추진 될 때 ‘쿨라크’ 즉 ‘부유한’ 농민으로 체포되어 노동수용소 3년형을 선고받았고, 가족은 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집단농장에 빼앗겼다.

안토니나가 겪은 충격적인 경험은 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가장 깊은 상처는 ‘쿨라크’ 출신이라는 오명이었다. 사회 계급이 전부인 사회에서 안토니나에게는 ‘계급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계급의 적’은 고등교육기관과 많은 직업에 배제되었고, 스탈린의 통치 기간 동안 전 소련을 휩쓸었던 억압의 물결에서 항상 박해받고 체포되기 쉬운 존재였다. 사회적 열등의식 때문에 안토니나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쿨라크이기 때문에 정권이 우리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아무 권리도 없고 잠자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자랐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였다고 안토니나는 묘사한다. 안토니나는 너무 겁이 나서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다. - 21-23

 

그녀에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비에트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안토니나는 머리가 좋고 개성이 강한 젊은 여성이었다. 출신의 낙인을 극복하기로 결심한 안토니나는 언젠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로 인정받겠다고 마음먹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콤소몰, 즉 공산주의 청년동맹에도 가입

안토니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이 의심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원이 되었다….아마도 입당하면 경력에 도움이 되고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 - 23, 24 

 

스탈린 폭정 아래 살았던 평범한 소련 시민들의 내면 세계

공포정치가 개인과 가족 생활에 끼친 영향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통치 시기에 어떻게 사적 생활을 영위했는가? 그들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친척들이 받은 억압 때문에 안토니나처럼 늘 공포를 느끼는 상태에서 살아갔다. 그들은 어떻게 그와 같은 불안에 대처했는가? 

그들은 ‘망가진 이력’의 낙인을 극복하고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 적응했는가? 

공포정치 체제에서의 삶은 친밀한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충성스러운 소비에트 시민으로서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는 일과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정부를 믿는 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도덕의 진공 상태인 스탈린 체제에서 인간의 감정과 정서는 어떻게 힘을 보존할 수 있었는가? 수많은 삶을 지탱한 생존 전략, 침묵, 거짓말, 우정과 배신, 도덕적 타협과 적응은 어떤 것이었는가? - 25-27

 

조용하고 순응적인 주민은 스탈린 통치가 낳은 지속적인 결과다. 골로빈 집안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심지어 일부는 안토니나처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친척에게까지 과거를 숨겼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가족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집 밖에서 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배웠다. “우리 같은 아이들은 배워야 할 듣기와 말하기 규칙 같은 게 있었어요”라고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중간 간부급 볼셰비키의 딸은 말했다.

때때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고는 우리에게 ‘벽에도 귀가 달려 있지’ ‘입조심해’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이웃들의 눈과 귀를 피해, 때로는 자녀들에게도 소련의 공적 규범과 충돌하는 정보와 견해, 종교적 믿음, 가족의 가치관과 전통, 사적 생활 양식을 숨기면서, 이중 생활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속삭이는 사람whisperer’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에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 구분은 소련 사회 전체가 이런저런 부류의 속삭이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스탈린 시대의 관용 어법에 기원이 있다. - 27-29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체제가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침투하여 그들의 모든 가치관과 관계에 영향을 끼친 방식을 탐구하는 책이다.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힘과 지속적인 유산은 국가 구조나 지도자 숭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 출신의 역사가 미하일 게프테르가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에게 침투한 스탈린 체제”에 있었다. - 29 

 

일부 역사가에 따르면, 개인이 소비에트 정치의 공적 담론에 규정된 조건을 넘어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으며, 어떤 다른 생각이나 감정도 ‘자아의 위기’로 느껴졌고 마음속에서 몰아내야 했다..소비에트적 가치와 사상의 내면화

소비에트 사고방식soviet mentality은 대부분의 경우 옛 가치와 믿음이 금지당하거나 억압당해 자리를 내준 의식의 영역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식으로 되려는’ 불타는 욕망이 아니라 수치심과 공포 때문에 소비에트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

소비에트 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스탈린 정권의 희생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존 수단이었고, 만일 겉으로 드러낸다면 자신들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의심과 공포를 억누르는 데 필수적인 방법이었다. - 32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한, 특히 소비에트 체제에서 자신의 개인적 출세를 결정하는 순간에 내린 도덕적 선택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는 데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그 동기와 믿음을 억지로 설명하는 것으로 당시 자신들의 처신을 종종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기는 하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 34

 

시모노프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공익에 봉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귀족적 가치, 특히 군사적 의무와 복종의 정신을 물려받았고, 이 가치들은 시모노프의 마음속에서 그로 하여금 스탈린 체제의 지휘 체계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공적 행동주의와 애국적 희생이라는 소비에트 미덕으로 동화되었다.

자신이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또 기질적으로도 적극적인 활동가였던 시모노프는 젊을 때 소비에트 체제에 몰두하여 체제의 도덕적 압력과 요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 38

 

스탈린은 1924년에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가두고 있는, 구사회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태도와 습관은 사회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선언했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자 하는 이 전투 - 51

 

볼셰비키는 교육을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열쇠로 보았다...어떤 소련 교육 이론가는 1918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공산주의 세대로 만들어야 한다. 부드러운 밀랍처럼 영향을 받아 변하기 쉬운 존재인 아이들은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주조되어야 한다. - 69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못했으나-그들은 혁명을 '선'과 '악'의 단순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 혁명가들의 영웅적 행동에 공감할 수 있었다. - 71

 

이다 슬라비나는 “국경일마다 학급 전체가 행진했습니다.”라고 레닌그라드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우리는 학교 대표로 행진하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창문에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건물을 지날 때면 우리는 조금 발걸음을 늦추면서 한목소리로 외치곤 했어요. “집에만 있는 사람들, 창문에서 구역하는 사람들, 창피한 줄 아세요!” - 72

 

또 다른 게임은 ‘수색과 징발’이었는데 이 놀이에서는 한 그룹(보통 사내아이들)이 적군 징발대 역할을 맡고, 다른 그룹(여자아이들)이 ‘부르주아 투기꾼’이나 곡물을 숨기는 ‘쿨라크’ 농민을 연기하곤 했다. 

‘적군과 백군’ ‘수색과 징발’ 같은 게임은 아이들에게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소비에트식 이분법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다.

아이들은 전반적으로 최근 역사의 기본 사실들에 관해서는 무지했지만, 정부의 선전, 책, 영화 등에 그려진 구체제 지지자들의 어둡고 위협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이미지는 많은 아이들에게 ‘숨은 적’들이 계속 존재한다고 믿도록 부추겼는데, 그러한 믿음은 구체제의 흔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비합리적인 공포심, 히스테리, 적대감을 낳은 가능성이 많았다. - 77

 

모든 피오네르들이 암기해야 하는 선서도 있었따…”소련의 젊은 피오네르인 나는 동지들 앞에서 레닌의 계울에 충실하고 우리 공산당의 대의와 공산주의 대의를 확고하게 지지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다.” 피오네르단은 자주 행진을 하고, 노래를 불렀으며, 체조와 스포츠 활동을 했다.

피오네르단은 조별로 구성되었고, 자체 플래카드와 깃발, 노래, 제복(흰색 셔츠와 붉은색 스카프)이 있었다. 특히 제복은 굉장한 자부심의 원천이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피오네르단에 끌린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운동의 의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한 피오네르는 기억을 더듬었다.

피오네르단을 통해 소련 아이들은 강력한 사회적 소속감을 경험했다...피오네르가 되는 것은 매혹적이고 가슴 뛰는 일이었으며, 붉은 스카프는 사회적 승인과 동등함을 타나내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사회적 배경 때문에 피오네르단에서 배제된 아이들은 심한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 78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행동주의자였기 때문에 콤소몰에 가입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기를 원했고 사회적 에너지를 배출할 수 있는 다른 통로는 없었다. - 84

 

1924년에 스탈린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더 좋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볼셰비키는 스스로를 자신들과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미덕과 책임의 담지자로 여겼다. 아론 솔츠는 <당 윤리>라는 영향력 있는 저서에서 볼셰비키를 차르 시대의 귀족에 비유했다. 

“오늘날 지배 계급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우리나라에 관습이 확립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활하고 옷을 입으며 이 관계 혹은 저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 87

 

평범한 볼셰비키는 마치 기성 종교의 신도들이 교회를 다닐 때 믿음을 실행하듯이, 의례-맹세와 노래, 의식, 숭배, 행동 규범-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당의 교리는 당의 모든 추종자들이 신조로 받아들여야 했다. 당의 집단적 판단은 정의로 인정되어야 했다. 지도부에 의해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받은 당원은 회개하고 당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신에게 내려진 평결을 기꺼이 받아들어야 했다...이런 태도는 왜 그렇게 많은 볼셰비키가 고발당한 범죄에 대해 결백한데도 숙청에서 자신의 운명에 굴복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진정한 볼셰비키는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신의 인격을 집단성, 즉 ‘당’에 담근다네...그는 당이 요구한다면 검은 것을 하얗다고 믿고 하얀 것을 검다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 90

 

솔츠는 자신의 책 <당 윤리>에서 당을 모든 볼셰비키가 동지들의 사적 동기와 행동을 면밀히 검토하고 비판하는 자기 단속적 집단체로 인식했다. 솔츠는 이런 식으로 개별 볼셰비키가 당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호 감시는 정반대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비밀스런 사적 영역에 숨기면서 겉으로는 소비에트 이상에 순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내보이도록 부추겼다. 이와 같은 위장이 충성심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이의를 드러내면 처벌하는 소비에트 체제에 널리 퍼졌다. 비밀과 기만이 거의 모든 소련 사람들의 필수적 생존 전략이 된 1930년대의 대숙청 시기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개인과 사회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숨어 다른 원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한편으로 가면을 쓰고 충성스러운 소비에트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 - 97

 

사람들은 이 이중성을 안고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적 자아는 공적 인격 뒤로 사라져버렸다. 어떤 사람이 회고하듯이, “나는 나 자신이 사칭해 왔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 246

 

정책 변화는 스탈린 체제에 대한 충성이 물질적 보상에 의해 확보되는 새로운 정치, 산업 엘리트들의 출현과 명백히 관련이 있었다. 5개년 계획으로 모든 경제 부문에서 기술자, 관리, 경영자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268

 

옛 당원들을 숙청하고 새 당원들을 모집하면서 1930년대에 당의 성격은 점차 변해 갔다. 노장 볼셰비키가 설 자리를 잃은 것과 동시에 행정직으로 승진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당 관료층이 일반 산업 인력 사이에서 타나나고 있었다...이 관리 집단은 스탈린 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둥이 되었다.

1930년대 초에 나타나기 시작한 엘리트들은 일반적으로 순응적이었고 그들을 창출한 지도부에 복종했다. 평균적으로 고작 7년 동안 교육받은 새 관리들 중에서 독립적으로 정치적 사고를 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스탈린 체제에 완전히 공감했으며, 자신들의 개인적 가치를 체제의 이해와 연결지었고, 모두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실행함으로써 경력을 열심히 쌓아 나갔다. - 271

 

그들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물질적 행복과 사회적 지위의 원천인 소비에트 체제를 지키는 것 - 275

 

그리하여 체제는 출세 지향적인 사회의 확립과 연결되었고 이 사회의 핵심에는 당과 산업 엘리트, 기술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 군과 경찰 관리, 열심히 일함으로써 가치를 입증한 충성스러운 산업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중간 계급이 있었다. 새로운 사회 위계제를 규정하는 원리는 국가에 대한 봉사였다.

그들의 충성은 더 높은 임금, 소비재에 대한 특별접근권, 직함과 명예로 후한 보상으 받았다. - 278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많은 이들이 엔카베데가 문을 두드릴 때를 대비해 가방을 꾸려 침대 곁에 두었다. 이 소극적 태도는 대숙청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다.

그들은 엔카베데의 힘이 어디든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 힘 앞에서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져 저항하거나 도주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403

 

한 정보원은 언카베데가 접근해서..친구들에 관해 보고하라고 했을 때 양심과 어떻게 싸웠는지를 회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내 친구들은 누구인가? 나는 친구가 없다. 나는 나에게서 충성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충성을 바칠 의무가 없다.”

공포는 우정과 사랑과 신뢰의 유대를 찢어놓았다. 사람들이 생존 투쟁에 혼란 속에서 서로 등을 돌림에 따라 공포는 사회를 결속하던 도덕적 끈을 끊어버렸다. - 448

 

그래도 당을 신봉하는 사람들

대숙청이 벌어지는 동안 동료와 친구, 이웃이 홀연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총살대 앞에서 한 마지막 말로 판단해보건대, 야키르는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당이여, 영원하라! 스탈린이여, 영원하라!”

스탈린의 감옥은 당을 모든 정의의 원천이라고 끝까지 신봉한 볼셰비키로 가득 찼다. 

..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련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했다. - 450

 

주민 다수에게는 항상 두 가지 현실이 존재했다. 당의 진실, 그리고 경험에 따른 진실이었다. 그러나 소련 언론이 전시재판, ‘첩자’와 ‘적’의 극악무도한 행동으로 들끓던 대숙청 시기에 선전으로 조작된 세계의 실상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언론 보도를 안중에 두지 않고 숙청의 기본 전제를 의문시하려면, 보통 다른 가치 체계와 연결된 비상한 의지력이 있어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나 민족이 달라서,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당의 신조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비판적 관점으로 볼 수 있었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 아마도 나이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그들은 결백하면 체포되지 않는다는사실을 믿기에는 러시아에서 반대 사례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세계밖에 모르거나 가족에게서 다른 가치관을 물려 받지 못한 서른 살 이하의 사람이, 선전 체계 밖으로 나가 정치적 원리를 의문시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 453

 

가장 온건하면서도 동시에 가장널리 퍼진 배신의 형태는, 직접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불운한 이웃을 아는 체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며, 외면하고 피하는 것이었다...당신은 침묵을 지켰고 마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 473

 

고아원은 내가 결코 극복하지 못한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어요...그때 나는 한창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필요했어요.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상실감이 삶 전체를 덮쳤습니다.

나는 연락할 어머니가 없는, 편지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여자아이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어요. 아이들을 통틀어 어머니가 총살당한 유일한 아이였습니다.(긴 침묵) 그게 너무힘들었어요.

발렌티나의 상실감을 상쇄한 것은 고아원에서 다른여자아이들과 맺었던 우정의 힘이었다. 우정이 그녀를 절망에서 구했다.

그해 겨울 내내 갈리나는 몹시 아팠다. 젊은 시베리아 여성인 고아원 원장 옐리자베타 이바노바가 간호를 해주었다. 그녀는 갈리나에게 자신의 겨울 코트를 주었고, 자기 돈으로 이웃 집단농장의 우유를 사 먹었다. 자식이 없었던 옐리자베타는 이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를 몹시 사랑했따. 원장은 밤에 갈리나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갈리나가 학교에 갈 수 없을 때에는 공부를 도와주었다.

니콜라이와 마찬가지로 고아원에 있는 많은 아이들은 가족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사랑과 애정, 가족 같은 느낌을 준 부엌 일꾼들과 특별한 유대를 형성했다.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여성이었던 요리사들은 우리 고아들을 불쌍히 여겼고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다.

아이들은 할당지에서 일하는 지역 노인들을 방문하여 일을 도왔다. “그 일은 참 좋았다”고 니콜라이는 회상한다.

 

우리가 일을 거들면 할아버지는 기뻐하며 우리를 상냥하게 대해줄 것이었다. 따뜻하게 우리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인정과 애정을 받고 싶었고, 가족에게 받았을 모든 것을 필요로 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가족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다.

 

종종 아이들은가축이나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는 했따. “우리에게는 개, 토끼, 말들이 있었”고 니콜라이는 회고한다. 

고아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작은 상호 부조 모임이 생겨나 가족의 기본 기능을 상당 부분 수행했다. 동갑인 소년들은 자신들을 ‘인민의 적’이라고 부르면서 때리려고 하는 소년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뭉치곤 했다. 좀 더 나이 많은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수업과 하루 일과를 도와주었으며, 아이들이 밤에 울거나 침대에 오줌을 싸면 달래곤 했다. 아이들은 엄격하고 종종 잔혹하기까지 했떤 고아원 교사들에게 맞서 단결했다. - 51-55

 

많은 고아들처럼 미하일도 피오네르단이 자신을 받아준 때를 소비에트 사회에 완전히 편입한 순간으로 여겼다. 그때까지 그는 항상 자신의 태생을 부끄러워했다.

옛 유모가 고아원으로 찾아와 부모가 ‘인민의 적’으로서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유모는 이렇게 덧붙였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처럼 너도 총살되어야 해” 어린 시절 내내 미하일은 이 말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피오네르단에 가입했을 때 수치심이 비로소 없어졌다. - 58

 

피오네르가 된 미하일은 스탈린을 아버지처럼 권위가 있고 자신을 돌봐주는 인물로 우러러 보았다. 그는 좋은 것은 모두 스탈린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는 것, 우리가 공부할 수 있고 피오네르단 캠프에 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새해 나무가 있다는 것, 이 모든 사실들” 그가 보기에는 “스탈린 동지 덕택이었다” - 58

 

니콜라이 코바치도 피오네르단에 가입했을 때 매우 자랑스러웠다. 피오네르단에 가입함으로써 그는 고아원 외부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았고, 다른 또래 아이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수 있었다. - 59

 

그들은 이력이 더렵혀졌다는 오점 탓에 자신이 남들과 완전히 동등한 사회 구성원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만 한다고 강하게 느꼈다.

부모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노동자 학부에서 끊임없는 수치의 원천이었다. 동료 학생들은 제냐를 ‘모국 반역자’의 딸이라고 부르면서 잔인하게 괴롭혔다. - 62

 

‘인민의 적’ 자녀인 옐리자베타 델리바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자랐다. 피오네르단과 콤소몰에서 활동하면서 ‘소비에트 대의’를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비로소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 - 71

 

옐리자베타는 점차 공포를 극복했다. 콤소몰에 들어간 옐리자베타는 자신감을 얻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더는 흰 양 떼 속 검은 양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콤소몰에 가입해 ‘우리’ 중 한 명이 되었을 때,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었을 때, 나는 더는 두렵지 않았다….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었다. 강하게 보임으로써 마음속 두려움을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착촌에서 성장하면서 드미트리는 ‘쿨라크’ 출신이라는 오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1937년 콤소몰에 가입함으로써 근면함을 보상받았다. 마침내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받은 것이 자랑스럽고 기뻤던 그는 곧 활동가가 되었다. 74-76



통신 규칙이 완화됨에 따라 아크몰린스크 부인 수용소 여성들은 사랑의 증표로 편지와 함께 자녀들에게 보낼 작은 선물을 만들곤 하면서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그애들을 위해 만든 것을 가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라고 아크몰린스크의 한 죄수는 회고한다. - 86

 

우크라이나 출신 인쇄공 하마 볼로비치는 1937년 체포되어 극북의 한 수용소 구금형을 선고 받았을 때 스물한 살이었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 그녀는 아이를 낳고 아이의 사랑을 누리는 즐거움을 너무나 느끼고 싶었다. 

사랑, 연민, 애무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너무나 필사적이어서 정신이 이상해지고,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자살을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모두 아이-가장 소중하고 친근한 존재, 그를 위해서라면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어떤 사람-를 원했다. 나는 비교적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내 손으로 안을 어떤 사람, 고독과 억압과 수치의 그 오랜 세월을 견디기 위해 기댈 대상이너무나 필요했고 또한 간절했다. - 87

 

스탈린에 대한 시모노프의 믿음은 진실된 것이었다. 말년에 그는 그것을 절대 청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회고록에서 소모노프는 자신이 이 시에서 스탈린에게 엄난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 자신의 본심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 163

 

압제, 애국심, 적에 대한 증오가 모두 역할을 햇지만, 아마도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의 결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희생 숭배였을 것이다. 소련 인민들은 1930년대의 심리 상태로 전쟁터에 갔다. 항상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부단한 혁명적 투쟁 상태에서 살아온 그들은 전쟁을 벌일 태세가 되어 있었다. - 170

 

1940년대 말 어느 때인가 아흐마토바가 나데즈다 만델심탐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걷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 전쟁 동안이었다니! 그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굶주렸고, 내 아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아흐마토바처럼 1930년대 공포정치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전쟁은 일종의 해방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전쟁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상황탓에 어쩔 수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은 정치적 위험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화하고 서로 도왔다. 이 자발적인 활동으로부터 새로운 시민 의식이 싹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 시절을 향수에 젖어 회상하곤 했다. 그 시절은 파스테르나크의 말을 빌리면 “활력이 넘치던 시기”이며 “타인과 나누는 공동체 의식이 자유롭고 즐겁게 부활한” 시기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그때가 항상 좋았던 세월로 기억되는 젊의 시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우리가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나타난 개인적, 집단적 책임감...이 기간은 스탈린 체제의 하부 구조가 독일군의 침략 결과 사실상 붕괴해 사람들이 자체 자원에 의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시기다. - 192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 전쟁 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어서 당의 지시 없이 어떤 공동체도 자발적으로 구성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시민적 의무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제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언급했다. 작가 프리시빈은 1941년 일기에 적었듯이, “사람들이 전쟁이 개시된 이래 더욱 친절해졌고 모든 사람들이 모국을 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느꼈다. - 206

 

엘리트 계층으로 상승한 뒤로 시모노프의 외므는 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전쟁 시기의 ‘군인 차림’을 버리고 우아한 영국식 양복을 입었으며, 가벼운 옷차림을 할 때는 전후 시기에 유행한 미국산 터틀넥 스웨터와 황갈색 코트를 입고 챙이 짧은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 273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힘에 홀려 있었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현존을 느꼈고, 스탈린이 사실상 모든 면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꼈다. 스탈린은 후원자이자 보호자이고, 교사이자 안내자였으며, 비평가이자 고해를 듣는 신부였다. 아마도 때로 시모노프의 머릿속에서 스탈린은 간수이고 고문자이며 사형 집행인기기도 했을 것이다. 

시모노프는 소련 지도자에게 조금만 비판을 받아도 완전히 참담한 상태가 되었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이 왜 자신의 작품을 싫어하는지 알아내서 스탈린 마음에 들도록 소설을 수정하기를 몹시 원하는 마음으로 즈다노프에게 조언을 구했다. - 305

 

다음 편지는 알레세이가 아홉 살이던 1948년 여름에 시모노프에게 받은 것이다.

 

알료샤에게.

네 편지와 그림을 받았다. 특히 어린 수탉 그림은 내가 보기에 나쁘지 않구나. 그러나 자랑할 만한 이유가 없다. 기억하거라. 아버지는 네 나이 때 너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었고, 그래서 너는 따라잡으려면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최고 점수를 받겠다는 네 약속이 편지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진짜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다. -317

 

나는 스탈린의 그림자 아래에서 성인으로서 산 삶을 전부 보냈고-1924년에 레닌이 죽었을 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나의 모든 생각은 스탈린이란 존재가 형성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모든 질문을 그에게 던졌고, 그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든 답변을 주었다.

라스킨 또래나 더 잚은 사람들에게 스탈린은 도덕적 준거였다. 

그러나 더 이른 시기에 가치관이 형성된 일부 나이 많은 세대에게 스탈린의 죽음은 그만큼 기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 335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진 채 수용소에 돌아왔다. 수용소에서 지낸 몇 년 동안 사람들은 눈에 띄게 폭삭 늙어버렸다. 

그녀는 노동수용소에서 고문당하고 심하게 구타당해 온몸에 상처 자국이었다.

옐레나는, 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었다. - 380-382

 

아크몰린스크 부인 수용소는 지나이다 부슈예바에게는 다른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가 석방될 때 아홉 살이던 딸 안겔리나에 따르면, 수용소 생활을 겪으면서 어머니는 차갑고 엄격해졌다. 지나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한 사람이 되었다. - 385

 

어머니는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얼 생각하고 느끼는지 절대 말하지 않았다...아마도 어머니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진실은, 수용소 생활 후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387

 

시모노프가 찾은 가정의 행복은 흐루쇼프 해빙고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비록 처음에는 스탈린에게 등을 돌리기를 주저했지만, 시모노프에게 1956년의 변화는 정신적 해방을 의미했다. 알렉세이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56년 이후 아버지는 행복해지고 더 느긋해졌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과중한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업무 때문에 압박을 받지 않았어요.

..

아버지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고 따뜻해졌습니다. 정치에서 일어난 해빙이 아버지 가슴도 녹인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 466

 

생애 말년에 시모노프는 스탈린 체제에서 자신이 수행한 역할에 점점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마치 속죄라도 하려는 양 그는 스탈린 시대에 검열당했거나 억압받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후원하고자 했다. - 481

 

시모노프가 말년에 정치 사상에서 보인 새로운 발전은 그가 자신의 과거를 재검토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소모노프는 스탈린 통치 시기에 자신이 한 행동에 점점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도록 이끌었던 정치 체제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저는 평생 제가 한 많은 일들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알기로, 제가 했던 일들이 모두 다 좋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가장 숭고한 도덕적 원칙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

제가 충분한 의지와 용기 없이 행동한 결과 일어난 일들입니다. 저 자신은 잘 압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이를테면 일종의 참회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건 개인의 사적인 문제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 일을 기억함으로써 누구라도 저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거에 제가 했던 도덕적 타협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 484-486

 

이와 유사한 역설을 스탈린을 향한 인민들의 향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독재자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탈린의 희생자들 중 많은 이들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향수를 느끼고 있다. 2005년1월 전 러시아 여론 연구소가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42퍼센트가 ‘스탈린 같은 지도자’의 복귀를 원했다.(60세 이상 응답자 중 60퍼센트는 ‘새 스탈린’에 찬성했따) 이 향수는 정치나 이데올로기와는 아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스탈린 시절을 기억하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향수는 과거-상점이 물건으로 가득 차 있고, 사회적 질서와 안전이 있고, 5개년 계획의 단순한 목표에 따라 삶이 조직되고 의미가 주어지며, 스탈린이 그들을 대신해 사고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주기 때문에 모든 것이 흑과 백으로 분명했던 그들의 옜이야기 속 젊은 시절-의 회상에 바쳐진 감정과 더 관계가 있다. 이들에게 스탈린의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는 특히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진 이후 연금 수령자로서 사는 삶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많은 물건들이 가진 돈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물가가 오르고, 인플레이션으로 저축해놓은 돈은 쓸모가 없어졌으며, 범죄가 기승을 부려 집에 있는 노인들이 겁을 먹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 510

 

둘 다 억압당한 가족 출신인 남녀가 얼마나 많이 결혼했는지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다. 이 사람들은 서로 알 수 없는 힘에 끌린 것처럼 보인다.

라리사가 회고하듯이 이들이 서로 이끌린 것은 생애 처음으로 믿을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과거를 말할 수 있다는, 두 모두가 똑같이 받은 느낌과 연결되어 있었다. - 523

 

니콜라이와 옐프리다는 둘 다 스탈린 체제에서 억압당한 가족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서로 더 잘 이해하고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이해를 연대라고 부른다. 이 여자고 고생을 했고 억압당했기 때문에, 나는 이 감정, 우리 둘을 묶어주는 연대감을 항상 품어왔다...나는 우리가 함께 나눈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 둘 다에게 더 중요한 연대였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없어져버리지만, 연대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 525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한 1990년대 초, 스탈린 체제의 억압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토론하는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 두 사람이 마침내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할 때까지 안토니나는 남편의 출신 배경을 알지도 못했고 그에게 자신의 망가진 이력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