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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팔루디, <백래시-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22. 1. 27. 21:22

참 참 좋은 책이었고,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1980년대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요즘의 한국과도 닮은 점이 많더라구요. 이런저런 일들이 그래서 생기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구요.

 

2022년 아프가니스탄은 어떨까요?

탈리반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전 그나마 조금 열렸던 여성들의 사회 참여나 직업의 기회가 순식간에 닫혀 버렸겠지요.

 

미국, 한국, 아프가니스탄...

나라마다 사회마다 여성이 처한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거에요. 그리고 반페미니즘 운동의 요구에는 닮은 점도 있을 거구요. 

 

백래시와 반페미니즘에 관한 책인데,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더 좋았어요. ^^ 

수전 팔루디, <백래시-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아르테, 2021

 

언론계의 관행적인 상식에 따르면 1980년대의 싱글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싶어서 발강르 하고 있고, 이 발악은 해를 넘길 때마다 고조된다. 하지만 실세계 여성들에 대한 조사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15년간 여성 1만 명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해 1986년에 발표한 바텔연구소의 여성의 대토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더 이상 여성의 삶에서 결혼이 중심이 아니며, 30대 여성들은 결혼을 지연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기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1985년의 버지니아슬림 여론조사에 따르면 결혼반지 없이도 “행복하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여성이 70퍼센트였다. 랭거연구소와 시그니피컨스사가 1989ㄴ녀에 수행한 “새로운 다양성” 여론조사에서는 이 비중이 90퍼센터로 뛰어올랐다. 1990년의 버지니아슬림 여론조사에서는 싱글 여성의 약 60퍼센트가 자신이 기혼자 친구들보다 훨씬 행복하고 자신의 삶이 “훨씬 편안”하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경험이 없는 여성 90퍼센트가 “자신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14년간 전국적으로 실시된 조사를 살펴보면 1980년대 2, 30대 싱글 여성의 행복도가 11퍼센트 급등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연령대 기혼 여성의 행복도는 6.3퍼센트 하락했다. 

1985년 여성의 날을 맞아 6만 명의 여성을 상대로 조사해 보니 다시 해야 한다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는 여성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 69

 

여성의 소득이 늘수록 결혼에 대한 열망은 잦아든다. 싱글 3,000명을 상대로 한 1982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고소득 여성은 저소득 여성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할 가능성이 두 배 가까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진정으로 평등을 누리는 사회에서는 결혼과 출산이 어떻게 될까?” 프린스턴 대학교의 인구학자 찰스 웨스토프는 1986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면 할수록 결혼의 매력은 떨어진다” - 69

 

이들에게는 결혼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만일 심리학 연구를 통해 확인된 한 가지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결혼제도가 남성의 정신 건강에 압도적으로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정부의 저명한 인구학자 폴 글릭이 한때 평가했듯 “결혼은 생존을 지속한다는 측면에서 여성보다 남성에게 두 대 정도 더 유익하다”

미시건 대학교 사회연구소에서 남성의 정신 건강 변화를 추적하는 로널드 케스러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싱글 여성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 이 모든 활동들은 대단히 황당무계해 보입니다. 여기서 가장 악전고투하는 건 싱글 남성들이에요. 남성이 결혼을 하면 정신 건강이 크게 향상되죠.”

 

지난 40년간 다양한 결혼 생활을 들여다본 수십 건의 연구에 기록된 건강 데이터는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관되다. 싱글 남성의 자살률은 기혼 남성보다 두 대 더 높다. 싱글 남성은 숱한 중증 신경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두 배 가까이 높고 신경쇠약, 우울증, 심지어는 악몽에 훨씬 더 취약하다. 그리고 미국 남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속 편한 싱글 카우보이 이미지가 압도적이지만, 실제 싱글 남성들은 기혼 남성들보다 시무룩하고 소극적이며 혐오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 70

 

1984년 사회연구소의 이혼 통계 담당 인구통계학자들은 남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전국 데이터 30년치를 검토하고 난 뒤(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한 보고서에서) 딱 잘라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결혼 생활의 파탄 때문에 더 많이 힘들어하는 쪽은 여성보다는 남성이다” 우울증, 다양한 심리 장애, 신경쇠약, 정신 질환 시설 입원, 자살 시도 등 정신 스펙트럼의 어디를 보든지 간에 이혼남성의 상태가 더 나빴다. 

 

일단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전국 조사에 따르면 이혼을 원한 쪽이 자신이었다고 대답한 이혼 남성은 3분의 1미만인 반면, 여성의 경우는 자신이 이혼을 적극적으로 원한 쪽이었다고 답한 경우가 55-66퍼센트에 달했다. 

결별한 지 1년이 된 이혼 경험자에 대한 1982년 연구에서 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답한 여성은 60퍼센트였던 반면, 남성은 절반에 불과했다. 여성 과반수는 전보다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했지만, 같은 대답을 한 남성은 소수였다. 

 

이혼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미국 최대의 연구에서는 이혼한 지 5년이 지나면 여성들은 자신의 삶에 전보다 더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3분의2인 반면, 남성의 경우는 겨우 50퍼센트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10년 정도가 흐르면 삶의 질이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답한 남성이 절반에서 3분의 2로 늘어났다. 이혼한 지 10년된 여성 중에서 이혼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답한 경우는 80퍼센트였던 반면, 이혼 남성 중에서는 절반만이 여기에 동의했다. 연구 책임자 주디스 월러스타인은 “사실 (이혼에 대한) 이런 후회는 대부분 나이 든 남성들이 한다”고 말했다.- 82

 

이 모든 ‘충고’ 이면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집에 가라는 것이다. 조지아 위트킨-라노일은 <여성 스트레스 증후군>에서 “전업주부로 지내는 일에도 스트레스가 있지만 어떤 면에서 그건 동전의 더 쉬운 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증거(직장 여성과 비직장 여성에 대한 수십 건의 비교 연구)는 모두 이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전문직이건 생산직이건 직장 여성은 주부보다 우울증을 더 적게 경험한다. 그리고 도전적인 업종에 종사할수록 심신의 건강은 더 양호하다. 우울증 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은 한 번도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성이다.

미국 보건 인터뷰조사의 데이터를 기초로 한 연구의 결론에 따르면 “무기력은…가장 큰 스트레스를 야기할 수 있다” - 99

 

여성의 자존감에 유급 노동은 기본적이고도 유구한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신비’를 설파하던 1950년대에도 기혼 여성들에게 목적의식과 자부심을 어디서 얻는지 물어보자 3분의2가 직업이라고 답했다. 집안일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3분의 1뿐이었다. 1980년대에는 직업을 통해 개인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는다고 답한 여성이 87퍼센트였다. 요컨대 한 대규모 연구의 결론처럼 ‘여성 건강을 해치는 것은 저조한 노동 활동 참여율’이다.

 

여성들이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넓히는 데 일조한 여성운동은 여성의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 99

 

지난 10년간 발표된 숱한 정신 건강 보고서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1980년의 한 연구는 아내가 주부인 남성보다 직장 여성의 남편에게서 우울증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시건 대학교의 서베이연구소가 2,44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1982년의 연구에 따르면 기혼 남성의 우울증과 낮은 자존감은 아내의 고용 상태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었다. 연방의 ‘고용의 질 조사’에 대한 1986년의 한 분석에서는 ‘남성들은 맞벌이를 신분 하락으로, 여성들은 신분 상승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직장 여성의 남편들은 주부를 아내로 둔 남성보다 심리적인 고통이 더 크고 자존감이 낮으며 우울증을 더 많이 겪었다.

이들은 ‘젠더 역할 변화에 대한 기존 연구들이 남성은 무시한 채 여성에게만 집중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결과는 이런 강조가 잘못되었고 여성의 역할 변화가 남성의 삶과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 102

 

여성의 권리 신장을 저지하려는 반격

여성들이 평등을 향해 조금이라도 전진할 때마다 반격은 마치 문화계에 잠시 만개했던 페미니즘에 찬물을 끼얹는 필연적인 이른 서리처럼 다시 등장한다. 미국 문학가 앤 더글러스는 “다른 유형의 ‘진보’와는 달리 우리 문화 내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은 항상 이상하게 원상회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여성사학자들은 수년간 미국 페미니즘의 “가다 서다 하는 행보”와 “발작적인 움직임” “자꾸 끊어지는 걸음걸이” 앞에서 어리둥절했다. - 109

 

반격이 진행 중일 때는 그 어떤 여장부라 해도 주눅이 들 수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하는 사회 분위기가 고조되고, 반격의 잔혹한 혀가 관습을 무시하는 선구적인 여성을 닦아세우는 끔찍한 처벌을 용인 가능한 분위기로 만들기 때문이다. - 125

 

마거릿 컬킨 배닝은 1935년 여성의 권리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성과가 있었고…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남성들의 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말없이 크고 깊어졌다” - 126



1980년대에 미국 남성의 태도를 7년에 걸쳐연구한 작가 앤서니 애스타라캔은 자신이 조사했던 남성 중 “독립과 평등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진정으로 지지한” 남성은 5-10퍼센트뿐임을 알게 되었다. 1988년 <지큐>가 의뢰하여 3,000명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인 ‘미국 남성 여론 지표’에서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남성은 4분의 1이 안 되는 반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선호하는 남성은 과반수였다. 60퍼센트의 남성이 어린아이가 있는 아내는 집에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여성운동에 대한 남성의 태도를 살펴본 다른 연구들(안타깝게도 이런 연구는 대단히 적다)은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지지가 가장 크게 확대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을 거라고 밝히고 있다. 이 짧은 시기에는 여성해방이 일종의 유행이었고 그 이후로 이 유행은 잦아들었다. - 126 

 

페미니즘의 희미한 그림자만 드리워져도 남성정체성이 말살될 것만 같은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여성 평등에 정확히 어떤 의미인 것일까?

지난 20년간 사회적 태도를 추적해 온 전국 규모의 거대한 조사인 ‘양켈로비치 모니터yangkelovich monitor’의 설문 조사가 밝혀낸, 크게 주목받지 못한 연구 결과는 우리를 그럴싸한 대답으로 휼륭하게 안내한다. 

 

‘양켈로비치 모니터’의 조사 요원들은 20년간 대상자들에게 남성성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20년간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의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이는 지도자나 운동선수, 바람둥이, 의사 결정자가 되는 것도, 심지어는 단순히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을 잘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남성성의 확립이 무엇보다 가정의 주 소득원으로서 성송하는 데 달려 있다면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보다 더 직접적으로 미국의 허술한 남성다움을 위협하는 힘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만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남자가 무엇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면 1980년대의 경제적 상황에서 반격이 분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남성의 실질임금이 급격히 줄어들었고(백인 남성이 유일한 소득원인 가정의 경우 수입이 22퍼센트 급락했다) 전통적인 남성 부양자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전체 가정의 8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남성성의 지배적인 정의가 아직도 경제에 발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어째서 반격이 두 남성 집단, 즉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 때문에 크게 타격을 받은 생산직 노동자들과 아버지와 형들이 만끽했던 상대적인 부를 거부당한 젊은 베이비 붐 세대 사이에서 가장 거세게 터져 나왔는지를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 133

 

여론조사 전문가 루이스 해리스의 표현처럼 경제적 양극화는 지난 15년 내에서 가장 극적인 태도 변화를 야기했다. 스스로를 ‘무력한’ 기분이라고 설명하는 미국인의 비중이 두 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제는 이 연구의 전국 샘플 중에서 5분의 1이나 차지하는 이 집단은 주로 소득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그래서 이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중위 연령 33세의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베이비 붐 세대의 가난한 남동생들로…양켈로비치 보고서는 화가 가득한 이 젊은 남성들을 완곡하게 ‘도전자들’이라고 불렀다. 

 

이 집단에 속한 남성들에게는 또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페미니즘을 두려워하고 비방한다는 점이다. - 134

 

이 시대의 경제적 희생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훔쳐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절도범이 여성이라고 의심한다. - 136

 

고통에 신음하는 남성들에게 부채를 살찌우고 일자리를 게워 내는 기업 담보 차입 매수, 1987년 블랙먼데이 주식시장 붕괴로 폭삭 주저앉은 투기 붐, 노조의 무력화, 빈민에 대한 레이건의 대대적인 지출 감축과 부자를 위한 세금우대 조치, 4인 가족을 빈곤선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최저임금, 평균 노동자 소득의 거의 절반을 먹어치우는 터무니 없는 주택 비용 같은 경제적 양극화의 진짜 기원은너무멀어 보이거나 추상적이었다.

적의 얼굴을 알 수 없을 때 사회는 그것을 만들어 낸다. 하락하는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과도한 집값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 같은 것들은 공격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1980년에는 그것이 대체로 여성들이었다 - 137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강인한 직장 여성에 대한 열광이 잠시 터져 나왔을 때는 <야간 작업조 메이시>(1943)의 앤 서든이 연기했던 항공기 노동자와 <밋 더 피플>(1944)의 루실 볼 같은 한 줌의 리벳공 로지형 인물들이 근육을 과시하면서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했고, 많은 여성 주인공들이 전문직, 정치인, 심지어는 임원 들이었다. 1940년대를 지나면서도 일부 적극적인 여성들은 자신이 할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아담의 부인>에서 캐서린 헵번이 연기했던 변호사는 법정 장면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고, <히스 걸 프라이데이>(1940)에서 로절린드 러셀이 연기했던 싱글 기자는 그녀가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이사 가기를 원하는 약혼자에게 “날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요. 난 교외에서 한가롭게 카드 게임이나 즐기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 신문기자라고요”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스크린상의 또 다른 여성 집단은 목소리와 건강미를 잃어 갔다. 잇따른 영화들이 곧 말을 못하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웠고, 뇌종양, 척추 마비, 정신 질환, 효과가 천천히 퍼지는 독 때문에 기력을 상실한 여성들이 침대에 누운 모습으로 영화에 나오기도 했다. 영화사학자 마저리 로젠의 관찰에 따르면 “1940년대 여성 제물들의 목록은 병원 환자 명부 같다”

1950년대에 이르자 오므린 무릎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메릴린 먼로로 상징되는 굴복당한 여성의 이미지가 승기를 잡았다. 메릴린 먼로는 뇌 수술을 받아 멍청해진 ‘레이디 인 더 다크’ 같은 모습으로 더 이상 의사의 명령에 맞서지 않았다. - 200 

 

<모정the good mother>(1988)에서 결혼을 거부하고 사생아를 가진, 재치 있게 말하는 귀여운 아가씨는 결국 호수에 빠져 익사한다.

<나인 하프 위크>(1986)에서는 싱글 직장 여성이 어떤 주식중매인의 사랑의 노예가 되는데, 이 남성은 그녀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 202

 

어떤 경우든 1980년대 말 영화에서 여성은 가정사가 원인일 때만(그러니까 가족과 모성을 위해서만) 소리를 칠 수 있고 주인공으로 나올 수 있다. - 202

 

뉴라이트 지도자들은 신도가 줄어들고 있는 시골의 근본주의 성직자들과 청중이 감소하고 있는 방송용 설교사들이었다. 복음주의 교회 신도들이 꾸준히 교외와 도시로 이주해 가고 젊은 세대는 종교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시골 교회들은 점점 비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과 얼랍은 현대 미국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이런 주기적인 현상을 연구하면서 “반격의 정치는 자신들의 중요도,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집단에 의한 반동을 정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배 질서를 옹호하려 하기보다는 철이 지난 질서나 상상 속의 질서를 복원하려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열마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사회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불안정한 경제적 사다리에서 견실한 발판을 찾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이런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최소한 혹독한 응징으로 위안을 얻고자 할 수는 있었다. 컨버디브코커스의 설립자 하워드 필립스의 선언대로 “우리는 우리에게 반기를 든 사람에게 복수할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번 생에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최소한 자신들에게서 행운을 빼앗아 갔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반격의 움직임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선호하는 희생양이 있었다. 미국보호협회에게는 천구교 신자들이 그런 조건에 부합했고, 코울린 목사의 ‘사회정의’ 운동엔 유대인들이 그러했으며, 당연히 KKK단에게는 흑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뉴라이트에게 주적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었다. - 364 

 

뉴라이트가 공산주의나 인종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매달렸다는 점은 그 자체로 지난 10년 동안의 여성운동의 힘과 지위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학자인 로절린드 폴락 페체스키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은 보수적인 가치와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성 해방 개념 때문에 ‘생활방식’이 위태로워진 커다란 집단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미국에서 가장 역동인 사회 변화 세력이 되었다.” - 366

 

양대 정당여성들의 끝 모를 배신에 진력이 난 일부 대표들은 전국 대회를 열고 제3당, 그러니까 여러 대의 중에서도 여성 평등을 위해 싸우는 당을 창당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다. 이 발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평소에는 전미여성연맹의 전국 대회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언론들이 격분과 노여움, 조롱으로 들끓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아웃룩’ 섹션의 편집자 조디 앨런은 한 의견 기사에서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갈등이 아니라 합의를 해야 할 때”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이들의 결의안은 심지어 신당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창당 가능성을 고민하는 ‘조사위원회’를 요구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표들이 고민해 보고 싶었던 당은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 같은 ‘여성 정당’도 아니었다. 대표들은 이 당을 인종 불평등, 가난, 오염, 군사주의에도 맞서 싸울 인권당이라고 폭넓게 정의했다.

언론과 기성 징치인 들(대통령을 비롯해서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메인 주와  미시건 주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인들이 비난의 말을 쏟아 놓았다)의 공포 반응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쳤다. 그 어떤 논설위원도 존 앤더슨이나 배리 커머너가 불과 8년 전에 제3당을 만들었을 때 이들을 청부 살인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제3당 아이디어가 촉발시킨 강력한 조롱은 여성 정치인들에게도 그만큼 강렬한 불안감을 안겨 주었음에 틀림없었다…실세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정계의 기득권 세력들은 전미여성연맹의 안을 ‘비현실적’이고 ‘철없다’며 조롱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켈로비치의 1989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수 여성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평균적인 미국 여성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가 자신들과 가깝다고 생각했을까? 다수 여성이 전미여성연맹, 여성운동 지도자들, 그리고 페미니스트 세 집단을 언급했다. - 425-428 

 

반격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전문가들은 워낙 다양하고도 맥락이 없어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일반화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마이크 앞에 섰을 때 개인적인 응어리를 풀어놓는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다.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진실되고 지적 호기심은 충분히 강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움직인 것은 본인이 채 인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사적인 갈망과 반감, 자만심이기도 했다. 뉴라이트 남녀, 그리고 레이건 진영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가정과 직장에서 지난 20년간 일어난 고통스러운 사회 변화와 씨름해야 했다. 

이들의 글과 말에서 ‘여성’은 그 많은 사적인 불안과 망령을 투사할 수 있는 전천후 스크린이 되었다.

 

이런 반격 사상가들의 치렁치렁한 학자복 아래에는 별로 학자답지 못한 충동이 감춰져 있었다. 이 중에는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자신의 승진이, 종신 재직권이, 명예가 희생되었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여성학의 탄생을 직업이라는 면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불안감을 조성하는 침략으로, 교정 잔디를 짓밟는 무단 침입이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지도자에게서 받은 실제 혹은 상상해 낸 모욕을 곱씹는 정치 전략가들도 있었다. 

이들이 여성운동과 싸우는 이유는 복잡하게 뒤얽힌 하나의 집합과 같고, 사적인 정황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반격의 이론가들은 심리학 사례 연구 대상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별로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상가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들(직업적인 고충에서부터 가정 내 역할 긴장까지)로 이들 사상의 고려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 432

 

레빈의 회상에 따르면 여성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로 처음 마음을 먹은 건, 그가 알고 지내던 일부 페미니스트 성향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행동거지를 바꾸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더 수년 전이었다. 그는 특히 한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여성해방의 수혜를 입은 한 친구의 여자 친구가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날 이런 식으로 보더니 ‘남자들이 변해야 할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정말 전체주의적이었어요.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 452

 

1980년대 자기 계발서 시장을 주름잡았던 상담사들은 여성을 분석하고 다룰 때 외부 요인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반격의 심리학은 1980년대에 여성에게 집중되었던 모든 사회적인 힘들, 매스미디어와 할리우드의 그 모든 멸시, 종교계와 정계 지도자들의 세치 혀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공격의 말들, 학자와 ‘전문가’들의 그 모든 섬뜩한 보고서들, 여성 병원을 상대로 한 폭탄 공격, 성희롱, 강간 같은 모든 형태의 폭력 사태를 못 본 척했다. 이런 대중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어진 문화적 맹공이 그 목표물에 가할 수 있는 정신적 손상을 고려하지 않거나 아예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506

 

이 책의 밑바탕에 있는 메시지는 신비주의라는 탈을 쓰고, 성숙하고 적극적인 변화보다는 순진하고 소극적인 수용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우드의 책은 평온을 비는 기도문의 표현을 차용하여, 여성들에게 변화의 능력을 시험하는 용기보다 지레 포기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평온을 더 많이 제시했다.

 

1980년대의 많은 심리 치료사들처럼 노우드에게도 여성을 상대로 한 감정적, 성적 폭력 때문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사상자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노우드는 남편과 연인의 언어적, 신체적 학대에 신음하는 수백만 여성들의 증언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이런 상황의 사회적 측면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 문제를 내부로 돌리는 설명을 제시했다. - 521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는 건 노우드의 계획이 아니다. 대신 그녀는 “내가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독자는 자기 확신을 ‘성격 결함’으로 여겨야 한다. 

이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힘을 벼리고 이용하는 법이 아니라 높은 데서 내려 주는 힘에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라헤이가 ‘영적인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결정과 권위를 향한 자신의 충동을 숨겼다면 노우드는 진짜 굴복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속이려 하기 때문이다. 

 

노우드는 자신 역시 자기 인생의 행위자라기보다는 단순한 영적인 매개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 522

 

반면 1970년대의 의식 고양 운동은 여러 가지 약점도 있었지만 최소한 참가자들에게 행동하고 발언하고 성장하라고 촉구했다. - 525

 

여성들의 요구가 늘어 가는 데 대한 남성들의 분노와, 여성들의 자율성이 늘어 가는 데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 - 533

 

릭스의 경우 가장 격하게 반대한 건 그녀의 첫 남편이었다. 그는 릭스를 자기 방식대로 길들이기 위해서라면 주먹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해에는 그가 릭스를 너무 자주 때려서 팜프레시에서 일하는 릭스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안대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도 했다(이 선물은 비참할 정도로 딱 맞았다. 릭스의 회상에 따르면 그 선물을 풀어 본 날 그녀의 두 눈에 멍이 들었기 때문이다) 릭스는 아메리칸상이안미드에서 일하기 전에는 남편의 구타를 그저 견뎌 내기만 했다고 말했다. 집이 남편의 소유였고, 남편이 일을 할 때는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집에 갖다 줬는데, 아들과 자신의 부모를 건사하느라 돈이 너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녀도 그럭저럭 돈을 벌게 되면서 남편을 떠날 힘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사이안아미드의 일자리가 내게 그렇게 중요했던 거죠” 그녀는 말했다. “언젠가 내가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644

 

이 여성들에게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편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남자들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했고, 자립과 자존감의 기본적인 원천이기도 했다. 이들은 일을 해야만 했고, 또 원했다. -  655

 

반격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여성들이 대단히 적극적이고 당당한 전략을 구사했던 얼마 안 되는 사례에서 이들은 결국 공적인 분위기를 바꿔 놓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의제를 설정했으며 많은 개별 남성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1989년 다시 활기를 찾은 낙태 선택권 옹호 운동이 낙태를 둘러싼 정치를 180도로 바꿔 놓은 사건이 여기에 부합하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989년 4월9일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를 옹호하는 여성 50만명 명이 국회의사당에서 행진을 하며 워싱턴 D.C. 최대의 시위를 벌였고 낙태 클리닉 문에서 낙태 반대 시위대와 맞붙었다. 

대대적으로 동원된 이 낙태권 동맹은 1989년 주 입법부에 제출된 수백 건의 낙태 반대 법안 중 몇 개만 빼고 전부 무력화시켰고, 낙태권 후보자들을 주지사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낙승시켰으며, 심지어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리 애트워터가 공화당은 낙태 문제를 ‘비호하는 정당’이라고 재명명할 정도로 겁먹게 만들었다. - 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