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첫 구절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한다. 공자는 ‘발분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오려 함도 알지 못할 따름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으면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재차 반복하여 강조한다.
이런 정신은 유가의 교의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미 중국인의 보편의식 또는 잠재의식을 이루어 일종의 문화심리 구조 또는 민족성격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은 철저한 비관주의자가 되기가 정말 힘들다. 그들은 항상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즐거움樂은 중국 철학 안에서 실질적으로 본체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 596
루쉰을 비롯한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끝내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
줄기차게 전통을 비판한 그는 중국 민족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낙관정신을 대표하는 듯하다. 즉 ‘날로 새로운 것을 일러 성덕이라고 한다’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진다’이다.
지금의 문제는 이른바 낙관과 개척을 천박한 진화론이나 결정론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루쉰처럼 그렇게 왜래문화의 영향을 흡수하는 속에서 생장하여 지닐 수밖에 없는 깊은 역사적 비애감, 인류의 운명에 대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현대적 형태의, 거대하고 깊이 있으면서 저항하기 힘든 낙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 597
- 리쩌허우,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중국인들이 그런지 아닌지는 제가 모르구요 ^^
그리고 낙관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잘 될 거라거나 어찌 되겠지 식이 아니라
인간도 세상도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어서 변화의 요소가 많다는 것이고
역사를 되돌아봐도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이루어진 것도 많다는 것이겠지요
여성들이 거리에 나서서 폭력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세상을 누가 꿈꾸기나 했으며
노동자면 그저 시키는대로 일이나 하고 월급을 제때 주기만 하면 감사히 고개 숙일 일이지
노동조합을 만들고 교육을 하면서 자본가의 학대에 저항할 거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1백 몇 십년전 전봉준도 동학의 농민들도
그들이 수없이 죽어가며 주장하던 것들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만큼이라도 이루어질지는 몰랐겠지요
총도 없고 권력도 없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요
당장 내일 탈리반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성들의 주장을 수용할 가능성은 낮을 겁니다
하지만 1년 뒤, 10년 뒤...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낙관적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때론 비관적이기도 한 현실의 삶에서 변화의 요소를 찾아내고
새로움을 향해 하루 하루 노력하고 한 사람 한 사람 힘을 더해가는 과정이겠지요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고향> 가운데
자존감이 높고 낙관적인 사람들은 성장을 더 많이 보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
정신적 유연성이란, 현실적인 제한점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보이면서도 여러 좋은 선택들이 가능하다는 현실적 낙관성과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 lopez 편, <긍정심리학3-역경을 통해 성장하기>, 학지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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