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종의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에 이어 두번째로 리흐테르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리흐테르의 인생이나 생각 등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의 음악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살아서 이런 연주를 했구나 싶고, 이런 연주를 하기 위해 이렇게 살았구나 싶습니다.
수많은 우역곡절과 복잡하게 오가는 순간 순간의 감정들을 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연주는 그가 내어 놓은 결과물입니다.
이 결과물을 내어놓기 위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연습을 하고 어떻게 고민을 하고 어떻게 에너지를 쏟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다만 그가 했던 말들을 통해, 그를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본 리흐테르의 삶이 모습이 제가 듣는 그의 음악과 닮았다는 겁니다.
그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고,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니 그의 연주가 더욱 듣고 싶어집니다.
리흐테르에게 감사드립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간 제게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해주고
순돌이와 길을 걸으며 고개 올려 바라본 커다란 나뭇잎에도 감사한 마음을 들게 해주셔서.
그리고 글쓴이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동안 추구하면 좋을 삶의 의미 같은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표지 그림 발렌 시도로프의 <하얀 눈>도 리흐테르와 잘 어울린다 싶구요 ^^
다그마르는 이렇게 썼다. “어느 날 스베티크는 보육원의 두 사내 녀석들에게 몰려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 어찌나 상처가 심했던지 코피가 줄줄 흐르고 양쪽 눈에 모두 멍이 들어 있었다. 폭행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스베티크는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맞기만 했다고 한다. 울지도 않고 도망치거나 도와달라는 소리도 내지 않고서 말이다”
…
스베티크에게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베티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타부슈 양을 올려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일라인 스타부슈, 선생님은 아시지 않나요? 저는 싸움을 할 수 없어요. 저는 아주 다른 종류의 아이라구요!”
…
다그마르에 따르면 스베티크는 단 한번도 전쟁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무기나 사격, 경쟁, 거친 행동이 수반되는 놀이를 싫어했다. - 73
리흐테르가 예술과 정치, 사랑, 일상사 등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경쟁을 평생토록 질시한 것 역시 짐작컨대 아마 이 시기 경험에 뿌리를 두지 않았나 싶다. - 75
리흐테르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모험과 시정으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자연을 벗 삼아 거의 공생 관계로 지냈다…우리는 자연을 사랑했고 숭배했다. 나는 일고여덟 살 무렵까지 요정과 인어의 존재를 믿었다. 내게 자연은 초자연으로 통하는 통로이자 신비로 가득한 세계였다. 자연의 모든 현현 이면에는 종교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동화의 세계에 기거했다”
평생에 걸쳐 리흐테르는 자연 및 그것이 낳은 모든 피조물들과 교감하는 범신론적 정서를 간직했다…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깨우쳤다. - 79
리흐테르는 여행 중 감시의 시선에 차츰 익숙해졌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전적으로 무감한 인간만은 아니다. 나는 지속적인 부담감이 무척 싫다. 그렇지만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함으로써 내가 느끼는 역겨움과 싸울 수 있었다” - 312
피셔디스카우는 이렇게 썼다. “그와 같은 인간을 한두 마디로 묘사하는 건 억지스럽거니와 되지도 않을 불가능한 일이다. 리흐테르는 선뜻 매력을 발산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 안으로 침잠하곤 했다.” - 345
그러나 굴드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콘서트 홀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패자와 승자를 따지지 않는다. 가령, 어느 청자가 연주회장에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경험한다고 할 때 그 시간은 다른 관객들과 공유된다. 불과 몇 분 만에 음악은 소리로 된 삶의 주기를 펼쳐 보이지만, 음악은 삶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상징하고 긍정한다. - 377
심리학자 앨런 윌리스는 저서 <사람들은 어떻게 바뀌는가>에서 대중과의 만남이 리흐테르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도록 하였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
만약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런 정도가 될 것이다. ‘나는 중요한 일을 시도하려 한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진지한 태도로 이 일에 임하려 한다. 나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창조하려 작정하고 있지만, 온 세상 모든 것이 이러한 노력을 위협한다. 기침 소리, 지각 관객, 3열에 앉은 수다쟁이 여인들, 그리고 연주 자체에 상존하는 위험들, 즉 집중력과 기억력 상실, 착각, 힘 빠진 손 등 이 모든 것들이 내 시도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나는 열정을 동원하여 그들과 맞서고 내 목적을 보호하고자 한다 - 381
리흐테르가 자신은 결코 지휘봉을 잡을 수 없으리라 단언하며 내놓은 해명을 이해하는 열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권력과 분석’에 대한 혐오다. ‘권력’ 부분은 자명하다. 자휘자는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데-권위 대신 ‘권력’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하리라-어릴 때부터 ‘어딘가 다른 소년’이었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에게 타인을 향해 행사하는 권력은 역겨운 것이었다. -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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