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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커쇼, <히틀러>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23. 10. 28. 21:46

2천쪽에 가까운 분량을 가진 책이라서 읽기만 하는데도 약간 시간이 걸렸습니다. 

요하임 페스트가 쓴 <히틀러 평전>과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히틀러가 어떤 심리상태를 가진 인간인지, 또 히틀러를 둘러싼 지배 집단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좀 더 알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 평전. 요하임 페스트

책을 다 읽고 나니...무섭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찌보면 정말 별 것 아닌 인간이란 존재가 어쩜 이렇게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그렇게 나쁜짓을 많이 하더니 히틀러도 괴벨스도 결국 자살을 했지요.

그렇게 죽을 거 왜 그런짓을 했는지...

여러가지를 앍게 되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파괴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2023년10월. ap

요즘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온갖 것을 때려부수고 있습니다.

나치가 저지른 일과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일은

어떤 닮은 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나치에게는 유대인 게토가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가 있지요.

가둬놓고 죽이고 때려부수기는 매한가지구요.

 

히틀러도 나치도 2차 세계대전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립과 파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이없는(?) 현실 하나는 히틀러+나치와 맞서 싸웠던 미국과 영국 등이 

고립과 파괴와 살인의 주역인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는 거구요. 

이언 커쇼, <히틀러 1>, 교양인

히틀러는 (아주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었지만) 그저 당 지도자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권력을 이끌어냈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나온 권력이었다. 그것이 제 구실을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 안에서 ‘영웅적’ 특성을 볼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31

이런 성격 특성들을 하나로 묶는 히틀러 내면의 강한 욕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끝없는 자기 우월감이었다. 권력은 히틀러의 최음제였다. 히틀러처럼 자아 도취에 빠진 사람에게 권력은 목표를 잃고 헤매던 젊은 시절에 목표를 제공했고, 화가로서 퇴짜를 맞고 사회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아 빈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지내고 1918년의 패전과 혁명으로 주변 세계가 와르르 무너진 인생 전반기의 쓰라린 좌절감을 보상해주었다. 권력은 히틀러를 너무나 강렬하게 빨아들였다. 

개인화된 권력을 무한정 추구하려는 욕망은 만족을 모르는 영토 정복 야심으로 이어졌다. 승산이 지극히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륙을 혼자서 집어삼키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세계 패권을 쥐기 위해 터무니없는 도박을 벌였다.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무자비한 팽창 욕구는 움추러들지도 않았고 식을 줄도 몰랐고 멎을 줄도 몰랐다. 그것은 이른바 ‘위대한 업적’이 계속 이어져야만 무너지지 않는 구조였다. 분수를 모르고 앞으로만 치닫는 과대망상은 결국 히틀러 체제를 자멸로 몰아가는 씨앗을 담고 있었다. - 33

“어느날 남편이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고, 혹시 우체국에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라더군요.” - 우어파어에 살았던 히틀러 가족의 이웃 -37

히틀러에게는 늘 기념비적이고 거대하고 장엄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 91

그것은 아웃사이더이자 혁명가였고 타협보다는 장렬한 패배를 선호하는 승부사였고 배척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함에 이르는 온갖 난관을 이겨내면서 생존 논리에 급급한 부르주아 윤리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기존 질서에 맞서는 도전자였던 천재 예술가의 장엄한 꿈이 만들어낸 세계였다. - 95

히틀러가 느꼈던 혐오감의 밑바닥에는 사회민주주의가 대변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문화적 우월감이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히틀러는 나중에 ‘하층계급’ 사람들과 접했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내 동료들의 경제적 곤궁, 그들의 거친 도덕과 윤리, 그들의 낮은 지적 성숙도’를 열거했다. - 116

히틀러는 뿌리 깊은 우월감에 젖어 있었으므로 가난하고 곤중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자기가 왜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강등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희생양을 찾기 위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 117

번듯한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전무했고, 그런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자격도 기대감도 없었고 오래 가는 친구를 사귈 능력도 없었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리라는, 아니 자기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원망한 사회를 받아들이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가 없었다. 
전쟁은 그런 히틀러에게 탈출구를 열어주었다. 스물다섯 살 먹은 젊은 이에게 전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이유, 몸 바칠 목표, 동지애, 생활의 규율, 일종의 고정직, 충일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속감을 안겨주었다. 군대가 히틀러에게는 집으로 다가왔다. 1916년 부상을 당했을 때 히틀러가 상관에게 내뱉은 첫마디는 “많이 다친 건 아닙니다, 중위님. 중위님하고, 우리 연대하고 같이 있을 겁니다.”였다. 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들었을 때 히틀러가 진급 대상에 오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연대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히틀러는 이 전란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끊임없이 그리고 언제나 흐뭇한 추억으로 회상했다. 군대 시절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았던” “유일한 때”였다고 히틀러는 한번은 지나가듯이 말했다.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었다. “군인이 되어서 너무나 좋았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 153

중산층 젊은이 사이에서는, 특히 학생 조직에서는, 전쟁열이 전쟁을 통해서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은 부르주아 질서의 굴레에서 드디어 해방되리라는 낙관론과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치유책인 전쟁을 찬미하련다” 이탈리아의 미래파가 그렇게 선언한 것이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서는 1914년 7월과 8월에, 물론 다는 아니었지만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젊은이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층도 그랬지만 독일의 지도자들도 몇 년을 끌어온 지루한 갈등과 거듭되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력 충돌이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정서가 자리를 잡았다. 후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낯설게 다가온 것은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 두드러진 경향이었지만 전쟁을 구원과 부활로, 분열과 반목을 이기고 숭고한 민족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민족 공동체의 창조적 동력으로서 거의 종교 체험에 버금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던 풍조였다. - 154

레히펠트에서 히틀러가 대중을 선동할 때 즐겨 써먹는 무기는 반유대주의였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거세게 공격한 것은 당시의 여론을 말하는 보도에서 드러나듯이 뮌헨 시민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정서를 대변한 데 불과 했다. - 205

히틀러가 어느 것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던 일은 자기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증오심을 퍼올려 다른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 217

히틀러는 처음에 남다른 혹은 독특한 정치 사상을 지닌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히틀러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포심과 편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부추겼다. 히틀러는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독창적으로 선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별반 효과는 없었다. - 218

새로 들어온 당원 중에 히틀러를 유력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데 발벗고 나선 사람이 둘 있었다.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었던 쿠르트 뤼데케는 한때는 도박에 빠져 있었고 바람둥이였지만 다녀본 데가 많아서 ‘세상 물정에 훤했고’ 승부사 기질이 있는 사업가였는데 “뜻이 맞는 지도자가 어디 없나 하고 찾던” 차에  1922년 8월 뮌헨에서 통일애국연합이 주최한 집회에서 히틀러가 연설을 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뤼데케는 넋을 잃고 들었다. 훗날 뤼데케는 이렇게 썼다.

나는 비판 감각이 마비되었다. 그 사람은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힘으로 군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독일인의 남성다움에 대한 호소는 곧 무기를 들라는 요구처럼 들렸다. 무기야말로 거룩한 진리가 담긴 복음서라고 그는 역설했다. 루터가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종교에서 말하는 회심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나는 그 순간 맛보았다…내가 누구인지, 누가 지도자인지, 무엇이 대의명분인지를 깨달았다. - 288

한프슈탱글은 대중을 압도하는 히틀러의 파괴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말솜씨도 소름이 끼쳤지만 강한 지도자를 원하는 무언의 시대적 열망과 자신이 느끼는 사명을 하나로 묶으면서 모든 희망과 기대가 실현 가능한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대중의 의식에 심어주는 비범한 재능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 290

히틀러는 한프슈탱글을 좋아했다. 부인은 더 좋아했다. 그렇지만 호불호의 기준은 얼마나 그 사람이 쓸모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프슈탱글은 확실히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사교 비서’인 셈이었다. 이 상류층 젊은이를 통해서 히틀러는 노이마이어 카페에서 월요일마다 모이던 서민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력 인사들과 만날 수 있었다. - 291

무한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 자신에게 메시아에 가까운 자질과 소명이 있다는 부동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1918년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소행을 응징하고 독일의 힘과 실력을 되찾아 ‘독일 민족을 위한 독일 국가’로 부활시킬 사람으로 독일 국민이 염원하던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자기라는 생각도 더욱 굳혔다. - 340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히틀러는 1922년 말부터 추종자들도 조금씩 기대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을 독일의 구세주로 보기 시작했다. - 362

히틀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론가, 조직가, 지도자의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 위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377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와 닿은 ‘진리’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과 맞서는 싸움을 신이 내린 소명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기가 십자군이라고 생각했다. - 377

감옥에서 나온 뒤로 히틀러의 자기 확신은 더욱 강해져서 이제는 자기야말로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유일무이한 대변자라고 믿었고 자기만이 독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 히틀러의 숙제였다. - 379

그러나 연기력은 다른 데서도 발휘되었다. 히틀러를 아주 가까이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자주 본 사람들은 히틀러가 하는 행동 대부분이 연기라고 굳게 믿었다.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의 손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나누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고, 굳은 못이 박힌 농부와 노동자의 손을 부여잡고 악수를 할 줄도 아는 소탈한 서민이었다. 

그렇지만 한때 함부르크 관구장을 지냈던 알베르트 크렙스는 히틀러는 “내적인 공감이나 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냉정한 계산으로 의도적으로 짜낸 조작을 통해서 대중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 414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의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가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 415

“운동 전투력 강화를 위한 지시 하달의 내부 배경”에 대한 1932년 12월15일의 각서는 히틀러가 생각한 당과 슈트라서가 생각한 당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정치 조직의 밑바탕은 충성이다.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지려면 그 전제 조건이 바로 복종이라는 사실을 가장 고상한 감정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충성심이다. 별의별 시책과 제도를 형식적으로 내놓아도 복종하려는 충성심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573

그런데 당 지도자들은 사실은 나치당 하부에서 뛰는 급진파 당원들의 압력에 부응하여 움직였을 뿐이었다. 룀 사태 이후로 돌격대 내부에서는 불만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유대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데 앞장선 것도 이 불만분자들이었다. 이들은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로만 알았다가 기대가 어긋나면서 배신감에 떨면서 사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돌격대원 중에서도 특히 젊은 급진파에게는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돌격대 내부 보고서에서도 지적한 사실이지만 이 급진파들은 이념적으로 적수였던 유대인, 가톨릭 신자, 자본가와 싸우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 777 

폭력과 소요의 효용 가치는 라인란트 지방의 쾰른-아헨 관구장 그로헤가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로헤는 1935년 3월과 4월에 유대인을 제재하고 공격하는 것이 "서민들의 다소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 문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로헤는 유대인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니까 당에 활력이 감돌고 서민층도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고 자화자찬했다.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물결은 나치 운동의 목표와 혁명적 열정을 잃고 방황하는 활동가들에게 일종의 분출구 역할을 했고 그 피해는 혐오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잔인한 탄압을 받았던 소수 민족 집단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 778

라인란트 승리는 히틀러에게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디트리히, 비데만 같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전에도 그랬지만 히틀러는 더욱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종교적 어휘가 연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틀 뒤 히틀러는 여전히 메시아의 감흥에 젖어 자신과 독일 민족을 묶는 신비로운 운명을 보았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여러분이 저를 찾아냈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찾아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일의 행운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예견한 대로 굴러간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나는 신이 나를 위해 깔아놓은 길을 잠결에 걸어가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다”고 3월24일 뮌헨 집회에서 히틀러는 기염을 토했다. - 815~816

이언 커쇼, <히틀러 2>, 교양인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히틀러는 두 가지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철천지원수인 유대인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유럽 대륙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목표는 서로 맞물려 있었다. 1920년대부터 히틀러는 인류 역사를 좌우한 것은 인종 투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세계관에 푹 젖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세계관을 배경으로 나온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 아무리 기존의 지도에는 안 나타났다 하더라도, 한번 정한 목표는 좀처럼 히틀러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독일과 유럽, 온 세상을 재난으로 몰아넣는 데 남다른 역할을 한 것도 결국 이런 목표에 악착같이 매달렸던 특유의 고집과 집착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수백만 명의 독일인 중에서도 세상을 히틀러처럼 보았던 사람은 많지 않았고 히틀러처럼 광적으로 자기만의 세계관에 집착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 28

히틀러의 선동이 먹혀든 것은 상처받은 대중이 듣고 싶었던 말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절망감을 잘 포착해서 불사조처럼 민족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사람들이 느끼는 미움과 아쉬움과 희망과 기대를 살려내는 데는 발군의 재주가 있었다. - 29

히틀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1918년에 겪은 패전과 혁명의 구렁텅이에서 독일을 구출하는 ‘구원’의 정치를 역설했다. 그런 선전이 먹혀들어 결국 1300만 명의 독일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은 100만 명이 넘는 열혈 나치 당원이었다. 그들은 히틀러가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속세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열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패전, 나라의 수모, 극심한 경제적 곤궁, 민주 제도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정치적 분열을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려는 심리,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족의 구원자라는 구호에 쉽게 넘어갔다. - 29

“유대인은 독일에서 사라져야 한다. 아니, 유럽 전체에서 사라져야 한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렇게 될 것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생각은 그 점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하다.”
- 괴벨스가 1936년 11월 15일과 1937년 11월 30일에 히틀러의 생각을 대변하여 쓴 내용 - 35

히틀러가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리려고 그렇게 서둘렀을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 와서 히틀러가 엄청난 반대를 뿌리치고 독일을 유럽 차원의 전면전으로 몰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체제 안의 다른 권력 기관들에 비해 히틀러의 권력이 워낙 커져서 1938년 봄이면 모든 제도적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권력 카르텔’의 모든 영역에서 무소불위의 우위를 굳혔다는 현실이었다. 5년 동안 히틀러의 철저히 개인화된 통치가 이어지면서 정책 결정에 집단의 의사가 끼어들 여지가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 143

친위대 지도자들은 독일이 추구하는 이념의 적을 사정없이 괴멸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믿었다. - 184

1920년대 이후로 히틀러는 독일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적수이며 어쩌면 제3제국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지닌 국제 유대인 세력과 유럽의 패권을 놓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겨루어서 이겨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히틀러가 보기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운명은 그런 도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 185

기세등등한 이미지는 부르크하르트가 도착한 직후 약간 손상을 입었다. 시중을 들던 직원 하나가 무거운 안락의자를 놓치는 바람에 히틀러가 발등을 찍혀 아파서 깡충깡충 뛴 것이다. - 268

히틀러는 다시 일 주일쯤 지나서 로젠베르크에게 폴란드의 독일화 작업과 추방 작업을 언급했다. 침공 이후 삼 주일 동안 폴란드에서 지내면서 히틀러는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편견을 다시 드러냈다. 로젠베르크가 기억하기로 히틀러는 이런 말을 했다. “폴란드인은 게르만 종족의 껍질이 얇게 덮여 있지만 그 밑은 더럽기 짝이 없다. 유대인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거리는 오물로 뒤덮였다. 요 몇 주 동안 느낀 점이 많을 거다. 만약 폴란드가 독일을 몇십 년 동안 지배했다면 천지가 이로 들끓고 삭아 문드러졌을 거다. 여기는 뭘 좀 아는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 - 318

히틀러는 10월13일 괴벨스에게 폴란드에 진주한 독일군이 "너무 물렁하고 만만해서" 하루 속히 민간인으로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폴란드인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면서 "아시아는 폴란드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 321

그라이저는 히틀러한테 점수를 따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를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점수만 딸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감수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의 말은 그에게는 하느님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히틀러에 의해 바르테란트 관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라이저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 목격자는 전했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며 친위대장도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틈만 나면 강조했다. - 325

점령지 폴란드에서 저지른 살인과 마찬가지로 그 조치는 돌이킬 수 없는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안락사 계획’이라고 에둘렀지만 1939년 가을부터 정신병자와 불치병 환자를 죽이는 그 사업은 나중에 오는 본격적인 절멸 사업의 신호탄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은 히틀러가 이념적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하고 벌이는 전쟁과 맞닿아 있었다.
10월 어느 날 히틀러는 지도자가 쓰는 전용지에다 전쟁이 시작된 1939년 9월1일로 날짜를 못 박아서 비서로 하여금 다음 문장을 받아 적게 했다. “전국지도자 불러와 의학박사 브란트는 용태를 신중히 평가하여 불치의 병으로 판정된 자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안겨줄 수 있는 쪽으로 해당 의사의 권한을 확대하는 책임을 맡는다.” 히틀러는 무제한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는 이 지시에다 펜으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이 무렵이면 벌써 히틀러의 구두 용인 아래 정신질환자를 죽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 328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불치병 환자는 자식을 못 낳게 해야 한다면서 자기 생각을 강하게 드러냈다. 생식을 통해 번지는 병을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나온 발언이었다. - 330

히틀러는 언제나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하는 듯 말했지만 4월 중순 나르비크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자 당황하여 아마추어 같은 군사적 판단력을 드러냈다. 이 당시 히틀러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발터 바를리몬트 장군은 “제국의 수장인 사람의 심지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요들이 쓴 일기를 인용하면서 그는 “굉장히 동요하고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 367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권력을 조금도 놓지 않으려고 하는 히틀러의 민감한 반응이었다. 무분별한 개인 지배에 제약을 가할 수 없다 보니 정부 수반의 지위를 괴링에게 넘겨 정말로 ‘전시 내각’을 꾸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히틀러는 자기 행동에 제한을 두거나 자기의 지위를 위협하는 데 어찌나 촉각을 곤두세웠던지 1942년 라머스가 내각회의를 다시 열자고 운만 뗐는데도 엄금했고 각료들이 저녁에 모여서 술 한잔 하는 것도 금지했다. - 396

1940년 여름 빈 관구장으로 임명된 발두어 폰 시라흐에 따르면 히틀러는 관구장이 셋 이상만 비공식적으로 모여도 음모를 꾸민다고 여겼다. - 398

더욱이, 과감하게 치고 나가지 않고 질질 끌려가면 결국 전쟁으로 쌓아 올린 심리적 자산을 내버리는 꼴이라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국가사회주의를 힘차게 이끌고 나가려면 팽창주의를 내걸고, 계속해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천년 왕국을 집요하게 추구해야 했다. 비전을 좁혀서는 안 된다. 종래의 영토 합의로 여정을 중단했다가는 꿈에 그리던 성배를, 곧 인종 정화와 인종 우위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를 손에 넣을 수가 없다고 히틀러와 추종자들은 생각했다. 나치즘이 활력을 되찾으면서 꿋꿋이 살아남으려면, 이념의 우위를 잃지 않으려면, 전쟁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 428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다음 몇 주 동안 자기들의 새로운 제국을 설계하느라 바빴다. 힘러는 1월 일부 친위대 간부에게 동방에서 슬라브 인구를 3천만명쯤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440

5월은 히틀러를 끝까지 피곤하게 만들었다. 막강한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5월27일 영국 군함과 전투기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대서양에서 침몰했다는 비보가 베르크호프로 날아들었다. 2,300명의 승무원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히틀러는 인명 손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히틀러가 분통을 터뜨린 것은 해군 지도부가 전함을 쓸데없이 적에게 노출시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닌 것과를 올린답시고 크나큼 위험을 무릅쓴 것을 히틀러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 475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헤스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고 전했다. 히틀러가 울었다면 아마도 헤스 때문에 받은 정치적 타격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교분을 나누었고 남다른 충성을 바쳐온 부하 하나를 잃은 데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회한은 없었다. - 477

앞서 살펴본 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전에 여론 조작 없이 단행된 소련 침공은 독일 국민에게 예방 전쟁으로 제시되었다. 괴벨스가 언론에 내려보낸 지침에 따라 소련 원정은 간악한 ‘유대 볼셰비즘’이 독일과 서구 문명 전체에 끼치는 위협을 마지막 순간에 저지하기 위해 지도자가 결단을 내린 것으로 발표되었다. 지도자의 용단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전보다 더 괴상한 것은 히틀러와 괴벨스도 정말로 그 말을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소련으로 쳐들어가서 짓밟은 결정을 어떻게 해서든 정당화하려다 보니 그런 억지를 부린 것이다. - 493

히틀러는 러시아인은 강제 중노동이 딱 맞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단언했다. “슬라브인은 토끼과다. 지배계급의 강압이 없으면 이들의 관계는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의 천성은 한마디로 무질서를 바란다.” 히틀러는 다른 자리에서 말했다. “우크라이나인은 매사에 토종 러시아인만큼이나 게으르고 어수선하고 아시아인만큼 허무주의로 기운다.” 직업 윤리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 그들은 “매”를 들어야 알아먹는다. - 495

히틀러는 무력이 곧 정의라면서 영토 정복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했다. 뛰어난 문화를 지녔지만 ‘생존 공간’이 모자란 민족은 이것만으로도 영토를 넓힐 이유가 된다. 언제나 그랬지만 히틀러는 이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보았다. “내가 지금 러시안인을 해친다면, 똑같은 이유로, 만일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러시아인이 나를 해칠 것이다” “경애하는 하느님께서 일을 풀어 가는 방식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하느님 덕분에 지상으로 난데없이 던져진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 앞가림을 하고 앞일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 것을 빼앗는다. 결국은 힘센 놈이 이긴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 이치가 원래 그런 것이다” - 498

히틀러는 인간 활동의 핵심이 전쟁이라고 보았다. “여자가 남자를 만나야 힘을 얻듯이 사람은 전쟁을 해야 힘을 얻는다”고 히틀러는 선언했다. - 498

히틀러가 생각한 사회의 ‘새 질서’는 이 같은 정복, 무자비한 수탈, 강자의 권리, 인종 차별, 목숨을 일회용품처럼 싸구려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준항구적으로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굴러갈 수 있었다. - 499

7월 16일 지도자 사령부에서 괴링, 로젠베르크, 라머스, 카이텔, 보어만을 불러놓고 다섯 시간 동안 한 중요한 회의에서 히틀러는 새로 얻은 영토를 다스리고 착취하는 정책과 실천 강령 작성에 필요한 기본 방침을 정했다. 이번에도 기본 전제는 강자에게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약육강식의 논리였다. - 500

바르바로사 작전이 갈수록 꼬인 것은 결국 전격적으로 나가면 소련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턱없는 오판의 결과였다. 독일이 전격적으로 나간 것은 적을 너무나 과소평가한 데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제를 깔았고 또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틀러의 오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전을 짠 군사 전문가들의 오판이기도 했다. - 518

동부 전쟁이 대학살로 끝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유대 볼셰비즘’을 뿌리 뽑는다는 이념 목표는 ‘절멸 전쟁’으로 치밀하게 꾸며진 계획의 알맹이었지 껍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 행동과 하나로 얽혀 있었다. 국방군을 등에 업고 침공 첫날부터 아인자츠그루펜이 살육을 자행한 데서도 대량 학살을 의도한 전쟁이라는 성격이 벌써 드러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면적 학살 프로그램으로 급진전되었다. - 566

그러고는 유대인은 무슨 일을 하거나 재주나 창의력은 없고 거짓말과 속임수에만 능하다고 극언을 퍼부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유대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둔한 악마다. 유대인은 제대로 된 음악가, 사상가도 없고 예술도 없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거짓말, 베끼기, 속이기에 능하다. 주위 사람들이 순진하니까 그래도 여기까지라도 온 거다. 독일 민족이 씻겨주지 않았으면 눈꼽 때문에 앞도 제대로 못 봤을 거다. 우리는 유대인 없이 살 수 있지만 유대인은 우리 없이 못 산다.

히틀러는 그동안 유대인을 통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유대인이 일으켰다는 전쟁과 유대인의 연결고리는 이제 히틀러의 공식 연설에서 다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무리 그저 수사일 뿐이었다고 해도, 아무리 골수 지지자들 앞에서 반유대주의 본능을 자극하는 선동에 목적이 있었다 해도, 사석에서 말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히틀러가 자신이 하는 말을 정말로 믿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 600

1941년 11월8일 뮌헨 거사의 주역으로 활동한 ‘노전사’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에서 히틀러는 유대인 전쟁 책임론을 다시 언급했다. 지난해에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전쟁의 배후에 ‘국제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아직도 걱정이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유대인은 언론, 라디오, 영화, 극장을 장악하여 국민들을 세뇌한다. 재무장과 전쟁을 통해 사업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 한다. 세상의 전란을 사주하는 장본인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의 손아귀에 들어간 영국은 ‘독일 민족을 적대시하는 세계 동맹’의 동력이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섬기는 머슴 중의 머슴’ 소련이 언젠가 독일과 대결하는 것은 불가피했다…스탈린도 ‘이 막강한 유대인에게 잡힌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통찰’의 무게에 짓눌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동부에서 생기는 위험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 600

히틀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이었다. 그러면서도 늑대굴이라는 야릇한 세계에 틀어박혀서 현실을 점점 등졌다. 전방하고도 후방하고도 담을 쌓았다. 고립은 인간미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오랜 세월 옆에서 시중을 든 사람에게도 히틀러는 우애는 고사하고 정다운 정을 베푼 적이 없었다. 히틀러가 진심으로 좋아한 것은 어린 셰퍼드뿐이었다. 지난 가을만 하더라도 히틀러는 인간은 웃기는 ‘우주 박테리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과 아픔은 알 바 아니었다. 히틀러는 공습이 시작된 뒤 야전병원과 폭력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학살도 보지 않았고 강제수용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포로들이 굶어 죽는 수용소도 보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적은 그저 짓뭉개야 할 해충일 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히틀러의 깊은 경멸감 앞에서는 동족도 비켜 갈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 수십만명의 사망자와 불구자는 그저 추상이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한 ‘영웅적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희생이었다. - 611~612

히틀러는 동부 전선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승리냐 멸망이냐’의 문제였다. - 631

독일은 성공할 것이고 또 성공해야만 한다고 히틀러는 못 박았다. 적이 이기면 ‘우리 독일 민족은 절멸당할 것이다. 아시아의 야만성이 유럽에 뿌리내릴 것이다. 독일 여자는 이 짐승들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지식인은 도살당할 것이다. 우리를 고등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특성은 절멸되고 말살당할 것이다’ 반대로 제국 이겨서 ‘생존 공간’을 확보하면 다음 세대들은 곡물, 철, 석탄, 석유, 아마, 고무, 목재를 무진장 얻을 것이다. - 633

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기질부터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이어서 대안에는 관심이 없었고 언제나 달아날 배도 불태워버리는 배수진의 각오로 임했다. - 647

11월19일 차이츨러는 소련군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 했다.

다음날 붉은군대의 ‘스탈린그라드 전위’는 도시 남부를 지키던 루마니아 4군을 격파하고 11월 22일에는 앞서 북쪽과 서쪽에서 방어선을 뚫은 소련군과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22만 병력의 독일군 6군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신임 참모총장은 6군의 스탈린그라드 퇴각을 재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11월 21일에 이미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일시적으로 포위당할 위험이 있더라도 6군은 버티라”고 지시했다. - 666

파울루스가 항복을 거부하자 1월 10일 소련군이 6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최후의 공격에 나섰다. 

몸이 꽁꽁 얼고 반은 굶어 죽어가던 독일군은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투하된 보급품도 잘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히틀러는 괴벨스 앞에서 6군이 처한 곤경을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아군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독일 역사의 영웅극’이었다. - 673~674

히틀러는 아직도 6군의 일부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적어도 괴벨스는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히틀러 자신이 더 잘 알았다. 6군은 막판에 몰려 있었다. 괴벨스가 지도자 사령부에서 히틀러와 대화를 한 1월22일 바로 그날 파울루스는 항복 허락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거절했다. 6군의 항복을 허용해 달라는 만슈타인의 비슷한 탄원도 뿌리쳤다. 명예의 문제에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히틀러는 6군의 투쟁이 독일 역사의 가장 위대한 투쟁에서 역사적 기여를 했다는 내용으로 6군에 전보를 보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명, 마지막 한 방이 남을 때까지” 맞서라고 지시했다. - 673-675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다. 독일군 21개 사단과 루마니아군 2개 사단 중에서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1만 3천 명의 독일군, 루마니아군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이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 675

히틀러는 공군 부관 벨로프의 말마따나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돌려 청중의 생각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는 데 기가 막힌 재주가 있었다. - 680

히틀러의 근본적인 잔인함을 옆에서 완화할 인물은 없었다. 수백만의 우상이었던 사람이(자기 말로는) 에바 브라운과 애견 블론디 말고는 말벗이 없었다. 

전쟁과 거기에 히틀러가 쏟아 부은 증오는 히틀러를 점점 갉아먹었다. 저녁 음악회는 스탈린그라드 이후로는 중단되었다. 히틀러는 장군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싫어서 이제는 왠만하면 혼자서 먹었다…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전쟁이 끝나서 전처럼 극장과 영화관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인생을 즐기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692~693

자신이 물꼬를 튼 전쟁이 "본국에 들어닥치니까" 이제는 몰라보게 늙고 몸도 갈수록 야위고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이던 독재자는 점점 국민한테서 거리를 두었다. 더는 내세울 승전보도 없고 상실과 고통만 쌓여가는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해서 국민 앞에 설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 693

히틀러는 무슨 일을 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던 괴벨스는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 “아주 다양한 각도의 대안들을 앞에 놓고 지도자는 결정을 못 내리고 왔다 갔다 할 때가 있다. 사람들한테도 늘 올바르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도움이 필요하다.” - 701

히틀러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지만 이것은 승리냐 멸망이냐의 간단한 문제였다. 괴벨스도 고백했지만 이제는 히틀러의 최측근 중에서도 속으로 이긴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파멸로 가는 길이 갈수록 훤히 보였다. 퇴로가 차단당하자 히틀러는 더 좋았다. 파멸의 공포는 강한 자극제였다. - 708

히틀러는 국민과 동떨어져서 국민 정서를 읽지 못했다. 히틀러는 오로지 보복만 생각했지만 독일 국민이 압도적으로 바란 것은 하늘에서 오는 공포로부터 제대로 지켜 달라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가정과 목숨을 앗아 가는 전쟁을 끝내 달라는 것이었다. - 732~733

위기와 재난이 쌓여만 가던 1944년 전반기에도 낙천주의는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자기 기만 없이는 그런 낙천주의는 불가능했다. 히틀러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절박함을 보이면서 계속해서 환상의 세계 안에서 살았다. 적이 침공해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경이로운 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에 엄청난 희망을 품었다. 경이로운 무기가 기대에 못 미쳤을 때도 히틀러는 두 세기 전에 7년 전쟁을 벌였던 불굴의 영웅 프리드리히 대제를 떠올리면서 적의 동맹이 워낙 허약해서 곧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독일이 패망하던 마지막 해까지도 히틀러는 그런 기대를 접지 않았다. 히틀러는 끝까지 기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 750

히틀러의 온 존재가 전쟁을 치르느라 소진된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 전의 느긋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지엽적인 일을 못 견뎌하고 일상적 화제와는 거리가 두고, 웅장한 건축 사업에 몰두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젊었을 때처럼 한껏 게으름을 피면서 시간을 느긋하게 쓰던 모습도 사라지고, 히틀러는 이제 빽빽한 일과표에 쫓겨서 늘 군사 전술의 세부에 신경을 썼지, 매일매일이 똑같은 판에 박힌 생활에서 전쟁 수행과 무관한 활동을 할 짬은 통 남겨 두지를 않았다. 밤에는 잠을 잘 못 잤고,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고, 낮과 초저녁에는 군 지도자들과 극도로 긴장해서 회의를 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그나마도 방에서 혼자 먹었다. 셰퍼드 블론디를 데리고 잠깐 산책하는 것 말고는 운동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보좌진이었다. 

매일같이 그렇게 사니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었고 차분하게 합리적으로 깊이 있는 성찰을 하기도 어려웠다. 
히틀러를 만나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히틀러가 많이 늙었다고 하나같이 지적했다…이제는 머리카락이 급속히 셌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구부정하게 걸었다. - 750~751

1944년이 되면 히틀러는 병자였다. 심하게 아플 때도 있었다. 1941년 처음 심전도를 검사해보았더니 심장이 망가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안 좋았던 위와 장은 날이 갈수록 더 애를 먹여서 탈이었지만 이것말고도 히틀러는 1942년부터 파킨슨병 증세가 보이더니 1944년에는 눈에 띄게 두드려져서 파킨슨병 발병을 거의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왼팔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떨었고 왼다리도 경련이 일어나 발을 질질끌면서 힘들게 걷는다는 것을 곁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은 다 알았다. 

격렬한 분노와 기분이 극에서 극으로 바뀌는 것이야 원래 히틀러의 성격이었지만,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빈도가 잦아진 것은 전세는 급격히 불리해지는데 그것을 뒤집을 방법이 없어서 그만큼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뜻이었다. - 751. 753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절대로. 주저 앉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세상도 함께 주저앉힐 것이다’ - 히틀러가 1944년 12월 말 공군 부관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에게 한 말 - 839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장군들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1933년까지 당이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이겨낸 것처럼 이번 전쟁의 위기도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자는 자신이 역사에 나오는 위대한 모범에 값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고 괴벨스는 적었다. 독일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한 세기가 아니라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선전장관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 941

히틀러는 아직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독일은 망한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