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그동안 한국(조선)이나 중국, 다른 국가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친 악영향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겁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난징학살 등등.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어떤 정치를 했고 어떤 심리 상태를 가졌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총리가 히틀러였고, 일본의 총리가 도조 히데키였습니다.
한 개인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을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개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히틀러는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자살을 했고, 도조 히테키는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후회나 반성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나 미안함 같은 것도 별로 없어 보이구요.
오직 자신들의 믿음이나 신념만 쫓고, 그것이 실패하자 안타까워 하는 것뿐이지요.
이를 다시 생각하면, 다른 인간의 안전이나 평안을 마음에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싶습니다. 개인의 심리는 물론이고 사회적 힘이나 조직, 법률과 제도로 만드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구요.
이스라엘이 지난 한달, 그러니까 2023년 10월7일부터 11월7일까지 대략 한달동안 1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였습니다.
독일 총리 히틀러가 그랬고, 일본 총리 도조 히테키가 그랬듯이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에게도 후회나 반성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끝장을 보겠다는 거친 목소리 뿐이지요.
심리 상태로만 보면 네타냐후는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와 닮은 점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의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대량 학살하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마음입니다.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육군 내부에서조차 그런 견해가 있었고, 참모본부 전쟁지도반의 <대본영 기밀 전쟁 일지>에서는 ‘드디어 싸움에 뛰어들게 되는가’라고 개전을 기뻐하는 기술마저 볼 수 있다. - 315
도조도 군무과의 장교를 통해 자신의 내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전해 듣고 있었다. ‘군인은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지키라고 하듯 도조는 그런 보고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관저에 쇄도하는 격려 편지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5년째, 내핍 생활에 지친 국민감정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찾고 있었는데, 그 요구가 도조에게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요구에 도조는 공포를 느꼈다. 국민도 군인도 민간 우익도 도조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미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 그 끝은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격려문은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 315~316
그리고 이런 미국이 ABCD(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 포위망의 선두에 서서 일본을 괴롭히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보라! 미국의 온갖 반일 행동을! 제국을 굳게 믿고 일억 국민이여, 단결하라!”는 격문을 뿌렸다.- 340
예산위원회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국방은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도조가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대답할 때마다 환성이 터졌다. 의회의 이런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관저에는 더욱 많은 편지가 도착했다. 연판장과 혈서까지 보내왔다. 민간우익과 재향군인회의 동원에 의한 것이 있는가 하면, 평범한 서민이 ‘미영격멸’을 노래한 것도 있었다. 그것은 사방 여섯 칸짜리 서가를 가득 채웠고, 총 3천 통이 넘었다. 중일전쟁 이후의 불만이 과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에너지는 도조에게 불안감을 줄 정도였다. - 341~342
12월30일자 대본영 발표는 채 3주가 되지 않는 기간 동안의 전과를 총괄했다. 중국에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이르는 무려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의 상황을 보고하고, 홍콩의 영미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고 말했다…홍콩만이 아니라 필리핀, 말레이, 영국령 보르네오, 괌 등에서도 점령지를 늘려가고 있으며, 일본군은 이미 “적의 비행장 62곳을 파괴하고 적기 4백여 대를 격파하는 등 기타 막대한 전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말은 듣는 국민들 대다수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379~380
도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싱가포르를 무너뜨린다면 일본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열게 된다. 그때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도의道義에 바탕을 둔 공존공영의 지역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 382
그리고 인도를 언급하면서 영국의 포학한 압제에서 탈출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참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런데 도조의 연설은 생각지도 못한 측면에서 평가를 받았다.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고 있던 지식인들이 이 싸움을 식민지해방전쟁으로 받아들이려 하면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
도조가 의회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그런 협력자들이 장소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잘못된 동아해방사상을 고취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의 관심이 깊어졌다. 특히 인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도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공감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 유럽의 아시아 지배의 상징인 인도 해방이 지식인의 감각에 어필했던 것이다. - 384~385
내정시찰에 나설 때 또는 관리를 호통칠 때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놓여 있었다.
‘천황께서 친히 다스리는 제국에서는 아무나 천황께 상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임무는 적자赤子의 대표로서 천황의 생각을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자신이 천황의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곧 천황에 대한 대역大逆’이라는 생각으로 자라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적자의 대표로서 그는 천황에게 올리는 중간보고와 결과보고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각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정치에서는 민심을 장악하여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천황 폐하의 마음을 국민 하나하나에까지 전함과 동시에 적자인 국민의 마음을 모아 천황 폐하께 귀일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수상의 역할도 대신의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390~391
도조의 뜻을 이어받은 익찬회 정치부장 후지사와 지카오는 익찬선거에서 추천을 받은 후보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국체관념에 철저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은 신국이라는 절대적 신념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396
그들은 보고서에서 추천 입후보자 467명 중 90퍼센트 가까운 사람이 당선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90퍼센트로도 충분하지 않다. 전국이 추천자로 채워지지는 게 좋다”
이것이 도조의 바람이었고, 그것을 헌병대에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도조에게 충성을 맹세한 헌병대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일부 성가신 정당정치가는 추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비협력적이고 부담스런 의원을 국회에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도조의 생각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교와 관료 사이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비추천 후보자 중에는 순수한 정당정치가가 많았고…”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잘 감시하라”고 도조는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명했다. 그 때문에 비추천 후보자에 대한 특고와 헌병의 탄압은 무시무시했다. 특고는 ‘전쟁비협력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들의 지지자들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경보국장 자신이 몇 차례 선거구에 가서 직접 진두지휘를 했을 정도로 선거방해가 심했다. - 396~397
물론 사적인 대화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도조의 정치 감각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조가 이 정도로 조잡한 감각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 천황의 적자赤子라고는 하지만 국민 중에는 무례한 자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폐하께서는 일시동인의 마음으로 일억 국민을 똑같이 인자하게 대하신다. 나쁜 아이일수록 더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을 바로잡는 것이 일본 법률의 존재 이유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484
이 무렵 도조 암살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고노에마저 작가 야마모토 유조에게 도조 암살을 암시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소문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자 반도조를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리는 공기는 점차 엷어졌다.
헌병대의 정보도 이전과 달리 도조에게 원활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도쿄헌병대 특고과장이었던 오타니 게이지로는 헌병대 내부에도 반도조 감정이 흐르고 있었으며, 소극적인 사보타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 524
반도조 움직임이 선에서 면으로 확산된 것은 7월6일부터이다. 이날 익찬정우회 의원회의가 열렸다. 전날의 상판 옥쇄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의원들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조의 뜻에 따라 의회를 움직이고 있는 마에다 요네조와 오아사 다다오도 젊은 의원들의 반도조 불길을 끌 수가 없었고, 결국 완곡하게 도조를 비판하는 결의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528~529
피헤리의 도조 심문은 일본인 2세인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갔다.
…
“태평양전쟁은 부전조약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만주사변과 지나사변도 그렇다. 이것을 사변이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정부에 부전조약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영미 측의 도전으로 제국의 생존이 위협당한 데 있다. 따라서 당연한 자위권 발동이다. 조금도 조약의 구속을 받을 일이 아니다.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은 지나 측의 부정행위 때문에 발발한 것이며, 이 역시 자위행위인 까닭에 구속을 받을 이유가 없다.” - 610
3월5일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갔다.
…
“평화애호에 관한 폐하의 뜻이 강하다는 것, 일을 수행할 때 협조와 중용을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동아 건설에 폭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폐하의 평화애호 정신을 잘 이해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영국과 미국이 제국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에 발발한 것이다. 본래는 폭력으로 대동아 건설을 수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 개시 후에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이 동아에서 영미를 축출하여 동아의 민족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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