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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쇼트, <마오쩌둥>을 읽고

순돌이 아빠^.^ 2023. 9. 18. 14:42

마오쩌둥에 관한 평전입니다. 읽고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 합니다.

책이 두꺼워서가 아니라 지배와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인간의 생명이나 권리가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때문입니다. 

이 책 하나로 마오쩌둥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저 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인생도 이야기로 풀자면 이리저리 복잡할 텐데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사람과 얽혀 있는 한 인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다만 대략적인 면은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대략적인 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일테구요.

세상에는 악당이 참 많습니다. 한반도로 치자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등이 있겠지요. 세계사를 놓고 보면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인물들이 있을 거구요.

제가 이런 악당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 관한 책을 읽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인간들이 활개칠 수 없는 인간 세상이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바닷가 모래알 흩뿌리듯 가볍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명을 빼앗는 인간이나 집단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의 목숨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목숨도 소중한 것이니까요.


필립 쇼트, <마오쩌둥1>, 교양인

마오의 선생은 바로 그런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학생을 대하는 엄격한 태도를 강조하는 부류였으며…거칠고 매섭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마오는 훗날 회고했다. 선생은 대나무 회초리를 자주 사용했으며 학생들은 매를 맞을까 봐 항상 공포에 떨었다. ‘향 피우는 판’ 역시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는 홈이 파인 나무판 위에 꿇어앉아 향 하나가 다 탈 때까지 심한 고통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리적 환경이 학생의 마음을 침울하게 만들었다면 교육 방식은 더 심각했다. 마오와 동료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그림책은 없었으며 어린아이들의 주의를 집중하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었다. 철저하게 반복해서 암기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2천년 동안 변함없이 전해 내려온 옛 글을 외우는 이 방식은, 마치 교육을 가능한 한 힘든 과정으로 만들어 엘리트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 49

하지만 마오의 혁명적 열의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직접 물을 길어 올 수는 없었다”라고 그는 훗날 기록했다. 다른 병사들은 직접 물을 길어다 먹었지만 마오는 행상에게 돈을 주고 물을 길어 오라고 시켰다. 그 당시에는 마오도 훗날 자신이 심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의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지식인들만이 청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다른 지식인이 입던 옷을 내가 입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노동자나 농민이 입었던 옷은 도저히 입을 수 없었다…그들은 너무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92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현명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강력한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 마오가 어린 시절 공부했던 유가 경전에 사상적 뿌리를 둔 것이었다. 후난성립제1중학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마오는 기원전 4세기 법가 사상의 창시자이자 진나라 재상이었던 상앙에 대해 글을 한 편 썼는데 그 글의 주제가 바로 ‘강력한 국가’였다.
그 글에서 마오는 법이 ‘행복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현명한 통치자의 입법 시도는 이따금 백성들의 “어리석음과….무지 그리고 고집” 때문에 좌절되곤 한다. 이렇게 백성들이 변화에 저항했기 때문에 “중국은 파멸 직전에 이르렀다”고 그는 썼다. 변화에 대한 중국 인민의 저항은 “(좀 더)문명화된 사람들이 보면 배를 잡고 한참을 웃어야 할 정도”라고도 했다. - 107

필립 쇼트, <마오쩌둥2>, 교양인

1941년 가을, 공산당과 국민당이 완난사변 직후 일촉즉발의 상황을 넘기자, 마오는 드디어 오랫동안 신중하게 준비해 온 정치적 대공세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바로 향후 4년간 지속되는 “옌안 정풍운동’이다. 정풍운동이 끝날 즈음이면 마오쩌둥은 더는 공산당의 집단적 지도부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다. 마치 신처럼 높은 단 위에 앉아서 명목상의 동료들을 굽어보며, 어떤 제도적 통제도 받지 않았다. - 58

이런 과정을 거쳐 표출된 비판의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지식인들은 1949년에 국민당의 실정을 종식시킨 해방자로서 공산당을 환영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집권한 지 8년도 채 안 되어 권력과 특권을 독점하고 스스로 인민으로부터 유리된, 새로운 관료주의적 계급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마오가 헝가리 봉기에서 끌어낸 교훈이 틀리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비공산당원 입장에서 볼 때 당 간부들은 정말로 “인민과 유리된 귀족층”으로 변했던 것이다. - 204

1959년 즈음에는 마오와 그의 정책을 비판하고서도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오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256

1950년대 말 마오는 제국 체제의 정상에 있었다. 이 체제는 레닌주의적 조직 구조로 강화되었으며, 모든 권력과 특권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런 체제 안에서 “모든 관리는 두 얼굴을 한다. 상급자 앞에서는 노예이고 하급자 앞에서는 폭군이다” - 275

절정에 오른 종교적 열광과 같은 흥분이 거리마다 넘쳐흘렀다.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 성스러운 익살극의 실체를 꿰뚫어보았다. 몇 주 뒤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문화대혁명은 대중 운동이 아니다. 총은 든 한 사람이 대중을 조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마오는 정치적 고지를 공략할 새로운 유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의 젊은 한 세대 전체가 절대적인 복종심을 품은 채 마오를 위해 죽고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354

일찍이 1965년 1월에 펑전은 정치국 동료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잔잔한 수면 아래 폭력성이 커지고 있으며 그것은 ‘무차별적 투쟁’의 형태로 폭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오가 문화혁명을 추진하는 데 이용했던 에너지가 바로 그 폭력성이었다. 마오는 그것을 중국인의 ‘투지’로 인식했다. - 356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마오는 변덕이 심해졌고 속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오는 어떤 정책을 극한까지 밀고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마오의 집무실 ‘국향서옥’에서는 병적인 의심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국의 한 급진파 인사는 이렇게 기억했다. “마오의 말년에는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우 드물게 그를 만났으며…직접 대면할 때면 우리는 그가 오류라고 지적할 만한 잘못된 말을 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마오는 의심이 너무나 많아져서 끊임없이 측근의 충성을 확인해야 안심했다. 

저우언라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석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배신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은 홍위병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감옥에 갇혀 학대당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가족을 우선한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