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인들

순돌이 아빠^.^ 2023. 10. 28. 18:03

5월은 히틀러를 끝까지 피곤하게 만들었다. 막강한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5월27일 영국 군함과 전투기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대서양에서 침몰했다는 비보가 베르크호프로 날아들었다. 2,300명의 승무원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히틀러는 인명 손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히틀러가 분통을 터뜨린 것은 해군 지도부가 전함을 쓸데없이 적에게 노출시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닌 것과를 올린답시고 크나큼 위험을 무릅쓴 것을 히틀러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 475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헤스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고 전했다. 히틀러가 울었다면 아마도 헤스 때문에 받은 정치적 타격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교분을 나누었고 남다른 충성을 바쳐온 부하 하나를 잃은 데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회한은 없었다. - 477

11월19일 차이츨러는 소련군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 했다.

다음날 붉은군대의 ‘스탈린그라드 전위’는 도시 남부를 지키던 루마니아 4군을 격파하고 11월 22일에는 앞서 북쪽과 서쪽에서 방어선을 뚫은 소련군과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22만 병력의 독일군 6군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신임 참모총장은 6군의 스탈린그라드 퇴각을 재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11월 21일에 이미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일시적으로 포위당할 위험이 있더라도 6군은 버티라”고 지시했다. - 666

파울루스가 항복을 거부하자 1월 10일 소련군이 6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최후의 공격에 나섰다. 

몸이 꽁꽁 얼고 반은 굶어 죽어가던 독일군은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투하된 보급품도 잘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히틀러는 괴벨스 앞에서 6군이 처한 곤경을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아군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독일 역사의 영웅극’이었다. - 673

히틀러는 아직도 6군의 일부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적어도 괴벨스는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히틀러 자신이 더 잘 알았다. 6군은 막판에 몰려 있었다. 괴벨스가 지도자 사령부에서 히틀러와 대화를 한 1월22일 바로 그날 파울루스는 항복 허락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거절했다. 6군의 항복을 허용해 달라는 만슈타인의 비슷한 탄원도 뿌리쳤다. 명예의 문제에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히틀러는 6군의 투쟁이 독일 역사의 가장 위대한 투쟁에서 역사적 기여를 했다는 내용으로 6군에 전보를 보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명, 마지막 한 방이 남을 때까지” 맞서라고 지시했다. - 673-675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다. 독일군 21개 사단과 루마니아군 2개 사단 중에서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1만 3천 명의 독일군, 루마니아군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이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 675

- 이언 커쇼, <히틀러 2>, 교양인

히틀러. bbc
미국 바이든 대통령(왼쪽).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오른쪽). the times of isr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