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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 또는 몰살을 추구하는

점령지 폴란드에서 저지른 살인과 마찬가지로 그 조치는 돌이킬 수 없는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안락사 계획’이라고 에둘렀지만 1939년 가을부터 정신병자와 불치병 환자를 죽이는 그 사업은 나중에 오는 본격적인 절멸 사업의 신호탄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은 히틀러가 이념적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하고 벌이는 전쟁과 맞닿아 있었다. 10월 어느 날 히틀러는 지도자가 쓰는 전용지에다 전쟁이 시작된 1939년 9월1일로 날짜를 못 박아서 비서로 하여금 다음 문장을 받아 적게 했다. “전국지도자 불러와 의학박사 브란트는 용태를 신중히 평가하여 불치의 병으로 판정된 자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안겨줄 수 있는 쪽으로 해당 의사의 권한을 확대하는 책임을 맡는다.” 히틀러는 무제한 사형 ..

지도자/지배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라이저는 히틀러한테 점수를 따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를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점수만 딸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감수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의 말은 그에게는 하느님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히틀러에 의해 바르테란트 관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라이저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 목격자는 전했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며 친위대장도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틈만 나면 강조했다. - 325 - 이언 커쇼, , 교양인

지배와 폭력, 편견과 혐오

히틀러는 다시 일 주일쯤 지나서 로젠베르크에게 폴란드의 독일화 작업과 추방 작업을 언급했다. 침공 이후 삼 주일 동안 폴란드에서 지내면서 히틀러는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편견을 다시 드러냈다. 로젠베르크가 기억하기로 히틀러는 이런 말을 했다. “폴란드인은 게르만 종족의 껍질에 얇게 덮여 이씾만 그 밑은 더럽기 짝이 없다. 유대인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거리는 오물로 뒤덮였다. 요 몇 주 동안 느낀 점이 많을 거다. 만약 폴란드가 독일을 몇십 년 동안 지배했다면 천지가 이로 들끓고 삭아 문드러졌을 거다. 여기는 뭘 좀 아는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 - 318 히틀러는 10월13일 괴벨스에게 폴란드에 진주한 독일군이 "너무 물렁하고 만만해서" 하루 속히 민간인으로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폴란드인은 때려..

이스라엘-가자 전쟁, 희생자 수(23.10.26 현재)

자료 : al jazeera https://www.aljazeera.com/news/longform/2023/10/9/israel-hamas-war-in-maps-and-charts-live-tracker 2023년 10월7일 - 2023년 10월26일(현지 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 사망: 최소 7,326명 어린이/청소년 : 3,038명 여성 : 1,726명 노인 : 397명 부상: 최소 18,967명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 사망: 최소 108명 부상: 최소 1,900명 이스라엘Israel 사망: 최소 1,405명 부상: 최소 5,431명

신도 아닌,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

기세등등한 이미지는 부르크하르트가 도착한 직후 약간 손상을 입었다. 시중을 들던 직원 하나가 무거운 안락의자를 놓치는 바람에 히틀러가 발등을 찍혀 아파서 깡충깡충 뛴 것이다. - 268 히틀러는 언제나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하는 듯 말했지만 4월 중순 나르비크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자 당황하여 아마추어 같은 군사적 판단력을 드러냈다. 이 당시 히틀러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발터 바를리몬트 장군은 “제국의 수장인 사람의 심지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요들이 쓴 일기를 인용하면서 그는 “굉장히 동요하고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 367 바르바로사 작전이 갈수록 꼬인 것은 결국 전격적으로 나가면 소련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턱없는 오판의 결과였다...

권력 집중의 위험성

히틀러가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리려고 그렇게 서둘렀을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 와서 히틀러가 엄청난 반대를 뿌리치고 독일을 유럽 차원의 전면전으로 몰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체제 안의 다른 권력 기관들에 비해 히틀러의 권력이 워낙 커져서 1938년 봄이면 모든 제도적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권력 카르텔’의 모든 영역에서 무소불위의 우위를 굳혔다는 현실이었다. 5년 동안 히틀러의 철저히 개인화된 통치가 이어지면서 정책 결정에 집단의 의사가 끼어들 여지가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 143 - 이언 커쇼, , 교양인 100% 올바른 결정을 내리거나 판단을 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완변하고 완전 무결한 인간이 실제로..

구원과 정치, 구원자와 정치인

히틀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1918년에 겪은 패전과 혁명의 구렁텅이에서 독일을 구출하는 ‘구원’의 정치를 역설했다. 그런 선전이 먹혀들어 결국 1300만 명의 독일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은 100만 명이 넘는 열혈 나치 당원이었다. 그들은 히틀러가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속세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열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패전, 나라의 수모, 극심한 경제적 곤궁, 민주 제도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정치적 분열을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려는 심리,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족..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을 가진 정치인

히틀러의 선동이 먹혀든 것은 상처받은 대중이 듣고 싶었던 말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절망감을 잘 포착해서 불사조처럼 민족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사람들이 느끼는 미움과 아쉬움과 희망과 기대를 살려내는 데는 발군의 재주가 있었다. - 29 - 이언 커쇼, , 교양인

정치나 지배에서 사상이나 세계관의 문제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히틀러는 두 가지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철천지원수인 유대인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유럽 대륙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목표는 서로 맞물려 있었다. 1920년대부터 히틀러는 인류 역사를 좌우한 것은 인종 투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세계관에 푹 젖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세계관을 배경으로 나온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 아무리 기존의 지도에는 안 나타났다 하더라도, 한번 정한 목표는 좀처럼 히틀러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독일과 유럽, 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