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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나르시시즘과 자기 확신

무한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 자신에게 메시아에 가까운 자질과 소명이 있다는 부동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1918년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소행을 응징하고 독일의 힘과 실력을 되찾아 ‘독일 민족을 위한 독일 국가’로 부활시킬 사람으로 독일 국민이 염원하던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자기라는 생각도 더욱 굳혔다. - 340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히틀러는 1922년 말부터 추종자들도 조금씩 기대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을 독일의 구세주로 보기 시작했다. - 362 히틀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론가, 조직가, 지도자의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 위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377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

정치, 그리고 사람을 도구나 수단으로만 여기는

히틀러는 한프슈탱글을 좋아했다. 부인은 더 좋아했다. 그렇지만 호불호의 기준은 얼마나 그 사람이 쓸모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프슈탱글은 확실히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사교 비서’인 셈이었다. 이 상류층 젊은이를 통해서 히틀러는 노이마이어 카페에서 월요일마다 모이던 서민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력 인사들과 만날 수 있었다. - 291 - 이언 커쇼, , 교양인

정치, 선전과 선동

히틀러는 처음에 남다른 혹은 독특한 정치 사상을 지닌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 히틀러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포심과 편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부추겼다. 히틀러는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독창적으로 선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별반 효과는 없었다. - 218 - 이언 커쇼, , 교양인

대중의 증오심 또는 혐오감과 선동

레히펠트에서 히틀러가 대중을 선동할 때 즐겨 써먹는 무기는 반유대주의였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거세게 공격한 것은 당시의 여론을 말하는 보도에서 드러나듯이 뮌헨 시민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정서를 대변한 데 불과 했다. - 205 히틀러가 어느 것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던 일은 자기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증오심을 퍼올려 다른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 217 - 이언 커쇼, , 교양인 무작정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중의 심리에 깔려 있는 혐오나 증오 같은 정서를 바탕으로/이용해서 선동을 합니다.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것이든 여성이나 흑인에 대한 것이든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니 선동이 가능한 것이고 선동을 하니 혐오감이 커지는 것이구요

전쟁으로 세상을 확 바꾸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중산층 젊은이 사이에서는, 특히 학생 조직에서는, 전쟁열이 전쟁을 통해서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은 부르주아 질서의 굴레에서 드디어 해방되리라는 낙관론과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치유책인 전쟁을 찬미하련다” 이탈리아의 미래파가 그렇게 선언한 것이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서는 1914년 7월과 8월에, 물론 다는 아니었지만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젊은이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층도 그랬지만 독일의 지도자들도 몇 년을 끌어온 지루한 갈등과 거듭되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력 충돌이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정서가 자리를 잡았다. 후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낯설게 다가온 것은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 두드러진 경향이었지만 전쟁을 구원과 부활로, 분열과 반목을 ..

전쟁과 투쟁 속에서 삶의 의미와 소속감 등을 찾는

번듯한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전무했고, 그런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자격도 기대감도 없었고 오래 가는 친구를 사귈 능력도 없었고 자기 자신을 반아들이라는, 아니 자기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원망한 사회를 받아들이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가 없었다. 전쟁은 그런 히틀러에게 탈출구를 열어주었다. 스물다섯 살 먹은 젊은 이에게 전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이유, 몸 바칠 목표, 동지애, 생활의 규율, 일종의 고정직, 충일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속감을 안겨주었다. 군대가 히틀러에게는 집으로 다가왔다. 1916년 부상을 당했을 때 히틀러가 상관에게 내뱉은 첫마디는 “많이 다친 건 아닙니다, 중위님. 중위님하고, 우리 연대하고 같이 있을 겁니다.”였다. 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들었을 때 히틀러가 진급 대상에 오르는..

혐오감과 우월감

히틀러가 느꼈던 혐오감의 밑바닥에는 사회민주주의가 대변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문화적 우월감이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히틀러는 나중에 ‘하층계급’ 사람들과 접했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내 동료들의 경제적 곤중, 그들의 거친 도덕과 윤리, 그들의 낮은 지적 성숙도’를 열거했다. - 116 히틀러는 뿌리 깊은 우월감에 젖어 있었으므로 가난하고 곤중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자기가 왜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강등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희생양을 찾기 위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 - 117 - 이언 커쇼, , 교양인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상태인지와 관계 없이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을 혐오하거나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