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1405

구원과 정치, 구원자와 정치인

히틀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1918년에 겪은 패전과 혁명의 구렁텅이에서 독일을 구출하는 ‘구원’의 정치를 역설했다. 그런 선전이 먹혀들어 결국 1300만 명의 독일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은 100만 명이 넘는 열혈 나치 당원이었다. 그들은 히틀러가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속세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열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패전, 나라의 수모, 극심한 경제적 곤궁, 민주 제도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정치적 분열을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려는 심리,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족..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을 가진 정치인

히틀러의 선동이 먹혀든 것은 상처받은 대중이 듣고 싶었던 말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절망감을 잘 포착해서 불사조처럼 민족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사람들이 느끼는 미움과 아쉬움과 희망과 기대를 살려내는 데는 발군의 재주가 있었다. - 29 - 이언 커쇼, , 교양인

정치나 지배에서 사상이나 세계관의 문제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히틀러는 두 가지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철천지원수인 유대인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유럽 대륙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목표는 서로 맞물려 있었다. 1920년대부터 히틀러는 인류 역사를 좌우한 것은 인종 투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세계관에 푹 젖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세계관을 배경으로 나온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 아무리 기존의 지도에는 안 나타났다 하더라도, 한번 정한 목표는 좀처럼 히틀러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독일과 유럽, 온 ..

정치에서 대중의 분노와 공격성

그런데 당 지도자들은 사실은 나치당 하부에서 뛰는 급진파 당원들의 압력에 부응하여 움직였을 뿐이었다. 룀 사태 이후로 돌격대 내부에서는 불만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유대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데 앞장선 것도 이 불만분자들이었다. 이들은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로만 알았다가 기대가 어긋나면서 배신감에 떨면서 사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돌격대원 중에서도 특히 젊은 급진파에게는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돌격대 내부 보고서에서도 지적한 사실이지만 이 급진파들은 이념적으로 적수였던 유대인, 가톨릭 신자, 자본가와 싸우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 777 폭력과 소요의 효용 가치는 라인란트 지방의 쾰른-아헨 관구장 그로헤가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로헤는 1935년 3월과 4..

정치, 충성과 복종

“운동 전투력 강화를 위한 지시 하달의 내부 배경”에 대한 1932년 12월15일의 각서는 히틀러가 생각한 당과 슈트라서가 생각한 당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정치 조직의 밑바탕은 충성이다.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지려면 그 전제 조건이 바로 복종이라는 사실을 가장 고상한 감정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충성심이다. 별의별 시책과 제도를 형식적으로 내놓아도 복종하려는 충성심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573 - 이언 커쇼, , 교양인

정치인, 그리고 연기하듯 사람을 대하는

그러나 연기력은 다른 데서도 발휘되었다. 히틀러를 아주 가까이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자주 본 사람들은 히틀러가 하는 행동 대부분이 연기라고 굳게 믿었다. …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의 손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나누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고, 굳은 못이 박힌 농부와 노동자의 손을 부여잡고 악수를 할 줄도 아는 소탈한 서민이었다. … 그렇지만 한때 함부르크 관구장을 지냈던 알베르트 크랩스는 히틀러는 “내적인 공감이나 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냉정한 계산으로 의도적으로 짜낸 조작을 통해서 대중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 414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

정치인의 나르시시즘과 자기 확신

무한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 자신에게 메시아에 가까운 자질과 소명이 있다는 부동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1918년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소행을 응징하고 독일의 힘과 실력을 되찾아 ‘독일 민족을 위한 독일 국가’로 부활시킬 사람으로 독일 국민이 염원하던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자기라는 생각도 더욱 굳혔다. - 340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히틀러는 1922년 말부터 추종자들도 조금씩 기대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을 독일의 구세주로 보기 시작했다. - 362 히틀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론가, 조직가, 지도자의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 위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377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

정치, 선전과 선동

히틀러는 처음에 남다른 혹은 독특한 정치 사상을 지닌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 히틀러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포심과 편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부추겼다. 히틀러는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독창적으로 선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별반 효과는 없었다. - 218 - 이언 커쇼, , 교양인

대중의 증오심 또는 혐오감과 선동

레히펠트에서 히틀러가 대중을 선동할 때 즐겨 써먹는 무기는 반유대주의였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거세게 공격한 것은 당시의 여론을 말하는 보도에서 드러나듯이 뮌헨 시민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정서를 대변한 데 불과 했다. - 205 히틀러가 어느 것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던 일은 자기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증오심을 퍼올려 다른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 217 - 이언 커쇼, , 교양인 무작정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중의 심리에 깔려 있는 혐오나 증오 같은 정서를 바탕으로/이용해서 선동을 합니다.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것이든 여성이나 흑인에 대한 것이든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니 선동이 가능한 것이고 선동을 하니 혐오감이 커지는 것이구요

전쟁으로 세상을 확 바꾸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중산층 젊은이 사이에서는, 특히 학생 조직에서는, 전쟁열이 전쟁을 통해서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은 부르주아 질서의 굴레에서 드디어 해방되리라는 낙관론과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치유책인 전쟁을 찬미하련다” 이탈리아의 미래파가 그렇게 선언한 것이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서는 1914년 7월과 8월에, 물론 다는 아니었지만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젊은이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층도 그랬지만 독일의 지도자들도 몇 년을 끌어온 지루한 갈등과 거듭되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력 충돌이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정서가 자리를 잡았다. 후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낯설게 다가온 것은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 두드러진 경향이었지만 전쟁을 구원과 부활로, 분열과 반목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