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1405

전쟁과 폭력, 위선과 기만

도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싱가포르를 무너뜨린다면 일본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열게 된다. 그때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도의道義에 바탕을 둔 공존공영의 지역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 382 그리고 인도를 언급하면서 영국의 포학한 압제에서 탈출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참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런데 도조의 연설은 생각지도 못한 측면에서 평가를 받았다.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고 있던 지식인들이 이 싸움을 식민지해방전쟁으로 받아들이려 하면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 도조가 의회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그런 협력자들이 장소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잘못된 동아해방사상을 고취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의 관심이 깊어졌다...

가해자(국가)가 피해자(국가)라고 주장할 때

그리고 이런 미국이 ABCD(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 포위망의 선두에 서서 일본을 괴롭히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은 “보라! 미국의 온갖 반일 행동을! 제국을 굳게 믿고 일억 국민이여, 단결하라!”는 격문을 뿌렸다.- 340 파헤리의 도조 심문은 일본인 2세인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갔다. … “태평양전쟁은 부전조약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만주사변과 지나사변도 그렇다. 이것을 사변이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정부에 부전조약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영미 측의 도전으로 제국의 생존이 위협당한 데 있다. 따라서 당연한 자위권 발동이다. 조금도 조약의 구속을 받을 일이 아니다. 만주사변과..

전쟁이나 폭력으로 해방감이나 카타르시스를 얻고 싶어하는

도조도 군무과의 장교를 통해 자신의 내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전해 듣고 있었다. 군인은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지키라고 하듯 도조는 그런 보고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관저에 쇄도하는 격려 편지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5년째, 내핍 생활에 지친 국민감정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찾고 있었는데, 그 요구가 도조에게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요구에 도조는 공포를 느꼈다. 국민도 군인도 민간 우익도 도조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미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 그 끝은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격려문은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 315 예산위원회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국방은 괜찮..

정치인과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장군들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1933년까지 당이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이겨낸 것처럼 이번 전쟁의 위기도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자는 자신이 역사에 나오는 위대한 모범에 값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고 괴벨스는 적었다. 독일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한 세기가 아니라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선전장관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 941 히틀러는 아직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독일은 망한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958 - 이언 커쇼, , 교양인

즐거움도 기쁨도 여유도 잃어버린 정치인/지배자

히틀러의 온 존재가 전쟁을 치르느라 소진된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 전의 느긋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지엽적인 일을 못 견뎌하고 일상적 화제와는 거리가 두고, 웅장한 건축 사업에 몰두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젊었을 때처럼 한껏 게으름을 피면서 시간을 느긋하게 쓰던 모습도 사라지고, 히틀러는 이제 빽빽한 일과표에 쫓겨서 늘 군사 전술의 세부에 신경을 썼지, 매일매일이 똑같은 판에 박힌 생활에서 전쟁 수행과 무관한 활동을 할 짬은 통 남겨 두지를 않았다. 밤에는 잠을 잘 못 잤고,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고, 낮과 초저녁에는 군 지도자들과 극도로 긴장해서 회의를 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그나마도 방에서 혼자 먹었다. 셰퍼드 블론디를 데리고 잠깐 산책하는 것 말고는 운동도 하지 않았..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정치인

히틀러의 근본적인 잔인함을 옆에서 완화할 인물은 없었다. 수백만의 우상이었던 사람이(자기 말로는) 에바 브라운과 애견 블론디 말고는 말벗이 없었다. … 전쟁과 거기에 히틀러가 쏟아 부은 증오는 히틀러를 점점 갉아먹었다. 저녁 음악회는 스탈린그라드 이후로는 중단되었다. 히틀러는 장군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싫어서 이제는 왠만하면 혼자서 먹었다…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전쟁이 끝나서 전처럼 극장과 영화관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인생을 즐기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692 자신이 물꼬를 튼 전쟁이 ‘본국에 들어닥치니까’ 이제는 몰라보게 늙고 몸도 갈수록 야위고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이던 독재자는 점점 국민한테서 거리를 두었다. 더는 내세울 승전보도 없고 상실과 고통만 쌓여가는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해서 ..

선과 악, 적군과 아군, 천사와 악마 등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정치인

히틀러는 동부 전선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승리냐 멸망이냐’의 문제였다. - 631 독일은 성공할 것이고 또 성공해야만 한다고 히틀러는 못 박았다. 적이 이기면 ‘우리 독일 민족은 절멸당할 것이다. 아시아의 야만성이 유럽에 뿌리내릴 것이다. 독일 여자는 이 짐승들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지식인은 도살당할 것이다. 우리를 고등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특성은 절멸되고 말살당할 것이다’ 반대로 제국 이겨서 ‘생존 공간’을 확보하면 다음 세대들은 곡물, 철, 석탄, 석유, 아마, 고무, 목재를 무진장 얻을 것이다. - 633 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기질부터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이어서 대안에는 관심이 없었고 언제나 달아날 배도 불태워버리는 배수진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정치인

히틀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이었다. 그러면서도 늑대굴이라는 야릇한 세계에 틀어박혀서 현실을 점점 등졌다. 전방하고도 후방하고도 담을 쌓았다. 고립은 인간미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오랜 세월 옆에서 시중을 든 사람에게도 히틀러는 우애는 고사하고 정다운 정을 베푼 적이 없었다. 히틀러가 진심으로 좋아한 것은 어린 셰퍼드뿐이었다. 지난 가을만 하더라도 히틀러는 인간은 웃기는 ‘우주 박테리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과 아픔은 알 바 아니었다. 히틀러는 공습이 시작된 뒤 야전병원과 폭력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학살도 보지 않았고 강제수용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포로들이 굶어 죽는 수용소도 보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적은 그저 짓뭉개야 할 해충일 뿐이었다. 인간..